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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mpebble Mar 05. 2017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회복되지 않는 과거를 안고 살아가기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 챈들러(케이시 에플렉)는 수리공이다. 리는 이집 저집을 다니며 고장난 배관을 수리한다. 카메라는 수리하는 리의 모습을 길게 응시한다. 리는 줄곧 무표정이다. 담담함보다는 무관심함에 가까운 표정. 삶에 어떤 기대도 없는 사람의 표정. 리가 있는 화장실 바깥에서 집주인들은 리에 대한 평을 쏟아낸다. 수리 속도가 느리다, 너무 불친절하다, 혹은 너무 섹시해서 내 스타일이라는 평까지. 리는 그런 말들에 동요하지만, 반응하지는 않는다. 수리를 끝낸 뒤 집 문을 닫고 눈이 쌓인 길로 덤덤히 내려간다. 그리고 수리하면서 나온 쓰레기를 커다란 쓰레기망에 던져 넣는다. 이게 리의 하루다. 하루종일 수리하고, 쓰레기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상의 반복.

 

사람을 대하는 리의 기본 자세.jpg


리는 영화 내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어깨를 꼿꼿이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걷는다. 세상에 아무 볼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걷는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 자리를 떠나거나 주먹을 날리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관객은 그의 무표정이 감정 없음이 아닌 감정 차단의 상태임을 알고 있다. 방어와 공격의 양극단을 왔다갔다하는 리의 행동들은 그의 일상을 가득 채운 두려움을 거꾸로 방증한다. 몸에 과도한 힘이 들어가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두려움이든 구체적인 공포든 무언가가 나를 해칠 것만 같은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불친절한 수리공은 주먹을 꽉 쥐고, 양옆을 살피면서, 눈 쌓인 도보를 성큼성큼 걷는다. 이제 그의 어깨는 바닥으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늘로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그에게는 씻겨지지 않는 과거가 있다.



그는 가족을 잃었다. 수리공으로 살기 전의 이야기다. 그는 주의력이 없고, 덜렁대며,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집으로 친구 열댓 명을 불러 밤 늦게까지 탁구를 치며 맥주를 마시는 게 취미인 남편을 상상해보라. 가족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거기다 눈치도 능력도 없는, 그야말로 "빻은" 가장. 그날 밤도 그랬다. 새벽까지 탁구를 치는 리와 친구들을 보다못한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는 "지금이 몇시인줄 아느냐, 아이들이 자고 있다"며 소리를 지른다. 리는 아내의 인정없음을 비웃으며 모임을 해산시키고, 시끄러운 목소리로 친구들을 배웅한다. 친구들이 떠나고 조용해진 집, 그는 맥주가 다 떨어졌음을 깨닫는다. 문득 거실이 쌀쌀하다고 느낀 리는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고 술을 사러 나간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아니, 애초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 떨어진 술이 문제였을까, 쌀쌀해진 거실이 문제였을까, 벽난로에서 튀어나온 장작 한 개가 문제였을까.


맥주캔이 담긴 봉투를 품에 안은 리 앞에 나타난 건 활활 타오르는 집. 아이들이 안에 있다고 오열하는 아내. 그런 아내를 진정시키는 소방관. 구경하는 이웃.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리를 평생 따라다닐 장면이다. 이제 리는 자신의 과거를 두려워하면서 산다. 과거가 미래가 되지 않도록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리는 작은 씨앗 하나도 자라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로지 수리하고, 눈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는 삶. 나는 리가 사는 방식이 선택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이제 이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리 앞에 어쩔 수 없이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 등장한다. 바로 친형 조(카일 챈들러)의 아들 패트릭(루카스 헤지스). 심장병을 앓았던 조가 죽고 난 후, 리는 조가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는 가족을 잃은 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다정하게 돌봐 준 형이었다. 리가 혼자 살 단칸방에 가구를 사서 넣어 주고, 몇 시간 동안 연락이 없으면 신고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 형. 그런 이가 옆에 있다면 우리는 생을 마감하지 않아도 된다. 리는 영영 사라진 형이 맡기고 간 아들 패트릭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본다. 이제 영화는 [리와 패트릭 - 리의 과거 - 리와 패트릭 - 리의 과거] 순으로 흘러간다. 리는 가족을 잃었을 때부터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삶을 이어나갈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여긴다. 그런 리가 심지어는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영화의 플롯을 따라 관객은 리의 숨막히는 두려움을 이해하게 된다. 시도때도 없이 리를 엄습하는 과거의 잔재에도 불구하고 패트릭을 보호하려 애쓰는 리의 여정에 관객은 기꺼이 동참한다.


다행히도 패트릭은 낙천적이다. 아빠가 죽은 사실을 알고서도 울지 않는다. 평소처럼 여자친구를 집으로 불러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과 밴드 연습을 한다. 영화 속 패트릭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냉동닭이다(아빠의 시체가 아직 냉동고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빨리 아빠를 땅에 묻자고 징징대는 패트릭과 장례식 절차를 모두 거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리의 다툼은 귀여워 보일 정도다. 그렇게 매일 투닥거리면서도 뜬금없이 "이따가 밴드 연습 있어. 데려다 줘"하고 패트릭이 부탁했을 때, 리는 1초의 주저도 없이 "그래" 라고 대답한다. 리는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지만, 패트릭에게는 "여자친구가 몇 명이냐"고 물어본다. 패트릭이 내뿜는 삶의 에너지에 리는 어느 정도 패배했을 것이다. 리는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았던 시간을 오로지 패트릭에게 허한다.



리는 패트릭의 일상에 참여할수록 수리공으로 살았을 때 느끼지 못했던 삶의 활기를 느끼게 된다, 로 영화가 끝나면 좋겠지만 영화는 그렇게 쉬운 결말로 관객을 이끌지 않는다. 나는 리가 결국 자신의 과거를 이기지 못하고 "I can't beat it. I can't beat it. I'm sorry." 라고 패트릭에게 말했을 때를 기억한다. 패트릭은 리가 자신의 집으로 완전히 이사 오길 바라지만, 결국 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식탁 의자에 앉아 패트릭은 울고, 리는 그런 패트릭을 위에서 감싸 안는다.


그리고 마지막. 조의 장례식을 마친 후 리와 패트릭이 함께 걸어가는 장면이다. 둘은 작은 야구공을 주고받으면서 걸어간다. 리는 평소다운 무표정으로 무심하게 공을 던진다. 그런데 어떤 공이든 패트릭이 받아낸다. 패트릭은 리가 던진 공을 끝까지 따라가서 받아내고, 다시 리에게 던진다. 그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이제 리를 돌보아 주는 패트릭을 상상한다. 영화는 리의 아픔을 낭만화하지 않고, 리의 아픔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리와 함께 걸어가는 이가 있다. 내가 던지는 공을 받아주는 이가 옆에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생을 마감하지 않아도 된다.



* 케이시 에플렉의 남우주연상 논란


케이시 에플렉은 후문이 많은 배우다. 2010년 자신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아임 스틸 히어>를 찍을 때 여성 스태프 두 명을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피해자들로부터 직접 고소를 당했다. 법정 밖에서 합의하여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케이시 에플렉이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연달아 오르면서 성범죄자가 남우주연상을 가져가게 할 것이냐는 논란은 계속됐다. 결과는 케이시의 승리. 골든글로브, 영국영화TV예술아카데미(BAFTA),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모두 케이시의 차지였다. 남우주연상 시상자 브리 라슨(영화 <룸>에서 성폭력 생존자 역을 맡았던)의 착잡한 표정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케이시의 수상 소식에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 한국 언론에도 케이시 에플렉의 남우주연상 수상 소식에 유감의 뜻을 표하는 칼럼이 실렸다. 하지만 정작 케이시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후 보스턴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이든 부당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미국의 인권 감수성도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 배우의 남우주연상 자격을 박탈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케이시의 연기는 출중했으나, 그가 저지른 성범죄는 절대로 잊혀지지도,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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