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와 그림책

우리에게는 아직

by 슬로렙

책상 위 선반에는 위스키가 하나 있다. 지난 8월에 선물 받았는데 아직 절반이나 남아있다. 한동안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없었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왜일까? 유난히 일이 바빴던 탓일 수도 있고 적당히 회사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말에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어서 짐짓 못 본 체한 것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없었나?


기억의 단편을 뒤적이다 떠올렸다. 아, 글 쓰는 중이었지 참... 유난히 문장이 안 뽑히고 자음과 모음이 제각기 뛰어다녀 단어 하나 만드는데도 골치가 아플 때면 정신은 더없이 산만해진다. 매일 보던 익숙한 물건들이 신기하게도 낯설어진다. 고작해야 책, 디퓨저, 위스키, 카메라 정도만 있는 책상도 세상에 다시 없을 신비가 된다. 호그와트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글자를 쫓아다니다 지쳐 책상의 신비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위스키에 도달한 나는 결국 뚜껑을 까버리고만 것이었다. 아주 잠깐 도피를 욕망했던 어제의 나는 숙취에 시달리는 오늘의 내가 되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탄했다. 이 참을 수 없는 주량의 가벼움을 어찌해야 하나.


아무튼 술을 탐한 자에게 숙취가 오듯이 과거의 욕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돈을 욕망하여 차트를 보는 내가 되었고, 인정을 욕망하여 일에 집착하는 내가 되었다. 고요를 욕망하여 홀로 산책하는 내가 되었고, 평안을 욕망하여 눈을 감고 숨을 쉬는 내가 되었다. 도피를 욕망하여 스크린에 정신을 담그는 내가 되었다. 욕망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어제의 욕망이 나를 그려내었듯이 현재 추구하는 욕망의 물감이 미래의 자화상을 그린다.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의 색채를 결정하고야 만다. 그러니 때때로 질문해야 한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그렇다면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말이다. 욕망을 추구하는 오늘이 켜켜이 쌓여 내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각자의 욕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샌가 사람들의 욕망이 비슷비슷해진 것 같다. 아름답고 멋진 외형, 노동에서 벗어난 자유,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는 육각형 인간과 같은 것들. 분명 세상에 존재하지만, 모두 동시에 닿을 수는 없는 화려한 그림에 모두가 눈이 팔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민한 생각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세상에 나온다는데 막상 새롭게 느껴지는 건 별로 없다. 아주 살짝 비틀어진, 같지만 같지 않은, 그러나 조금 더 자극적인 고만고만한 그런 것들이 스크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다른 걸 바라볼 새도 없게 만든다. 각자 다른 걸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늘 같은 걸 보는 우리는 같은 걸 욕망하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우리 삶의 주변 여기저기에 더 다채로운 욕망이 분명히 있음에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어쩌다 우린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화려한 그림을 다 같이 애타게 바라보며 빈곤함을 느끼게 된 걸까. 정치 또는 사회의 모략 탓일까? 아니면 대중을 탐하는 자본 탓일까? 그것이 무엇이라 한들 원인을 알았다고 해서 해소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끝내 완성될 수 없는, 아니 정확히는 아주 희박하고 희박하게만 완성될 수 있는 그림을 쫓는 욕망이 데려간 곳에서 나는,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래야만 할까.


이제는 소박한 욕망을 줍고 싶다. 눈앞에 두고도 스크린으로 비춰보는 모나리자처럼 닿을 수 없는 먼 곳만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 끝내 그려지지 못할 욕망을 버리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더없이 아름다운, 고귀하지 않아도 여전히 소중한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감이 아직 우리에게는 남아있다.


우리가 함께 그린 따스하고 소중한 그림들로 켜켜이 채워진 그림책을 덮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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