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고립, 발명

고유함을 향한 질문들

by 슬로렙

11월 9일 트레바리 커뮤니티 이벤트 '현대산책자 : 인문학을 통해 거리의 풍경을 바꿀 수 있을까?'를 다녀왔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었지만 아래의 세 가지 질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표현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은 사람을 예측할 수 있는가?

언제 지적 고립감을 느끼는가?

새로운 자신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시간이 지나 위 질문들에 대해 떠오르는 질문과 생각들을 흐름에 따라 써보았습니다. 해당 분야에 지식이 부족하여 탄탄한 근거도 없고 빈약한 논리와 구조를 가진 데다 명확한 결론도 없는 글이 되었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정도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을 던져준 현대산책자 인스타그램 @modern_promenader





인공지능은 사람을 예측할 수 있는가?


질문을 보자마자 다른 질문이 생각났다. 과연 AI는 인간을 제대로 학습했을까?


AI는 무엇으로 인간을 학습했을까? 데이터화된 인류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인간을 학습했기에 사실을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학습에 사용된 모든 데이터가 전부 정확하고 옳으며 편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의 기록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무작위로 고른 어떤 주제에 대해서라도 수없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온다. 그 모든 것들을 인공지능은 골고루 학습했을까? 그중에서 어떤 의견은 가장 많이 지지받으며 계속해서 반복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의견은 의도적으로 지워졌을 수도 있다. 지난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은 단지 그 시대를 지배한 관념에서 살아남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무엇을 선택하고 학습했을까?


개인이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알 수 없듯이, 인간은 인간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오독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기 오독은 인공지능의 인간에 대한 오독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AI는 인간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있을까? 어떤 존재로 학습했을까?


결여된 기록을 학습하는 AI는 자연스럽게 절대다수인 대중과 대중적인 개인의 평균을 쫓는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비주류의 데이터가 말소되거나 제외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학습에 유의미한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단지 평균에서 벗어난 이상값 혹은 이례적인 결과로만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갈수록 주류 문화는 더 견고해지고 비주류 문화는 떠오르고 잠기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 다수가 불편해하지 않을 것을 보여주는 AI는 은연중에 비주류의 데이터를 의미 있게 다루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밀어낸다. 한 번 소외되기 시작한 비주류는 계속해서 소외된다. 비주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모를 갖추고 자극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며 발버둥 쳐야만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비주류 또한 주류에 준하는 비주류와 소외된 비주류로 구분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AI가 예측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예측 가능해진 것이 맞을까?


인간이 예측 가능해졌다고 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실은 예측 가능하게 변화되어 가고 있다. 매일같이 빛을 내는 스크린을 통해 우리는 AI가 판단하는 인간, AI를 움직이는 사회와 자본이 생각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무의식중에 새겨넣고 있다. AI가 우리를 예측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예측가능한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측 가능하다는 말은 곧 예측대로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정치, 사회, 자본, 기술이 뒤섞여 이제는 더 이상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의도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언제 지적 고립갑을 느끼는가?


시대가 원하는 인간상을 욕망하도록 우리는 유도되고 있다. 이상적 인간의 면모는 조금씩 빠르게 달라지지만 아쉽지 않은 자산과 경제력을 가지고 대중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들로부터 동경을 받으며 외적으로도 건강하고 아름다운 어떤 사람. 혹은 육각형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일종의 판타지에 가까운 인간상을 우리는 욕망하게 되었다.


욕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는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사람을 원하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믿는 집단 착각에 빠지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대중이 개인의 합일지라도 대중이 곧 개인의 세세한 면모를 모두 대표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대중의 욕망과 이상에서 자신이 벗어나 있음을 직면할 때, 고립감에 빠진다.


더없이 다양성과 개성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은연중에 주류와 비주류는 구분되어 있다. 게다가 비주류 또한 적정한 규모가 갖추어졌을 때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비주류라면 대중이 원하는 자극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일시적인 관심을 끌 수 있을 뿐, 결국은 눈치 없고 이상한 혹은 기괴한 사람들로 낙인이 찍힌다. 다양성의 하나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들을 견디며 끊임없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대중의 눈에 띄어 익숙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이런 현실에서 사회가 욕망하는 인간상과 거리가 멀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에 속함을 알게 되면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두려움에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은 실질적인 소외로 이어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소외함으로써 또다시 소외된다.


최근 몇 년간 그토록 나다움과 고유함을 외치며 찾아 헤매게 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자신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자신을 어떻게 발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인상적이었다. 발견에서 발명으로의 전환은 찾는 것에서 만들어가는 것으로의 전환이었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이었다.


지금까지 나다움과 고유함을 찾는 것은 과거의 나를 바탕으로 현재의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오늘날까지 쌓아온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더듬어 나라는 사람의 성격, 취향, 욕망을 규정하고 가장 먼저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속 가능한 일일까?


고유함의 획득에는 강하게 찬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부분적으로 회의적이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소외감을 느끼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견에서 발명으로, 단어 하나를 바꾸어 고유함을 획득하는 관점을 바꾼 것은 의미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닌 미래의 어떤 자신을 재정의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욕망, 그 어딘가의 접점을 지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다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고유함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으로 사회에서 고유해지고 싶은가? 어떤 경험을 쌓고 어떤 기억을 기록할 것인가? 그것으로 고유해지고자 하는 욕망은 채워질 수 있을 것인가?


온전히 고유해졌다는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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