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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May 16. 2021

환상의 섬, 제주 #3

비우다, 그리고 채우다

제주 여행기 2편에 이어..


성산읍에 둘째 날 숙소를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 번째 날의 첫 여행지가 바로 성산일출봉을 만날 수 있는 곳인 까닭인데요, 당초 계획은 성산일출봉 등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시간 계획상 이번엔 포함하지 않았고 대신 성산일출봉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섭지코지를 향하기로 합니다.


섭지코지를 들리기 전 성산일출봉 바로 밑 바다인 광치기해변에 잠깐 들렀습니다. 3박 4일의 여행 중 가장 흐린 날이었기에 제대로 된 경치는 아니었지만 성산일출봉의 웅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어요. 제주도의 바다들은 각자의 얼굴이 모두 달랐습니다. 작고 소소한 해변부터 탁 트인 경치의 관광지까지 모두가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까요.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본격적인 3일 차 일정을 시작해봅니다.


광치기해변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좌)과 섭지코지의 유채꽃밭(우)


섭지코지는 성산일출봉과 더불어 제주 동쪽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해변에 높게 솟은 언덕을 따라 걷는 산책길 주변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며 유채꽃밭이 아름다웠어요. 저마다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혼자 오신듯한 아주머니가 저에게 사진을 부탁하시기에 흔쾌히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분에게도 제가 전날 겪었던 좋은 인연처럼 남았을까요. 그랬다면 좋겠습니다. 섭지코지는 일 년 내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고 해요. 제가 갔을 때에도 기분 좋은 솔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습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의 등대에서 동쪽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내려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마치 한 편의 현대미술 작품 같은 건축물 ‘글라스하우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건축 문외한인 저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안도 타다오’의 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 이 건축물은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달랐습니다. 멀리서 정면을 바라보면 제가 좋아하는 좌우대칭의 쌍둥이 건물 두 개가 붙어있는 형식이지만, 측면이나 후면에서 바라보는 형태는 또 달랐습니다. 콘크리트와 통유리로 지어진 차가운 인상의 건축과 제주의 대자연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같은 결을 가진 듯한 분위기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글라스하우스


아침 산책을 마친 후 차를 몰아 표선면으로 향합니다. 아침 겸 점심으로 ‘표선카라반국수’에 들러 보말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어딘가 촌스러운 외관의 밥집이지만, 맛은 아주 좋았습니다. 가게 뒤뜰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은 덤이었고요. 혼자 하는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근사하고 화려한 맛집보다 어딘가 허름하더라도 맛도 좋고 가성비가 좋은 가게들을 찾게 됩니다. 물론 남의 말만 믿고 갔다가 실패했던 곳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로컬 맛집으로만 찾아가면 중박 이상은 하는 것 같습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비 소식이 있던 날이었지만 다행히 아침에만 잔뜩 흐리다가 오후가 되니 점점 날씨가 좋아졌습니다.


원래 칼국수를 좋아하지만 조금 더 바다향이 났던 보말칼국수


배를 든든하게 채웠으니 후식을 먹어야겠지요. 다음 일정은 카페 겸 소품샵, 간단한 식사까지 가능한 ‘취향의 섬’이라는 가게입니다. 입구에서부터 귤 색깔의 의자가 반겨줍니다. 넓지 않은 크기의 가게였기에 웨이팅이 있어 그 시간에 기념품 구경을 했어요. 카메라 스트랩을 하나 구매하고 야외 웨이팅 공간에서 잠시 기다리자, 이내 자리가 났습니다. 시그니처 메뉴라고 하는 ‘보리개역커피’와 함께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 읽어봤습니다. 창 밖에 꽃냄새를 맡고 떠다니는 날벌레까지 낭만적인 공간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갔던 4월 마지막 주가 카페 형태로 운영되는 마지막 주였다고 해요. 잠시간의 휴식을 거친 후 6월에는 맛있는 음식점으로 다시 오픈한다고 하니, 다음번의 제주 여행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겠죠?


행운처럼 카페 운영 마지막 주에 다녀간 취향의 섬


‘취향의 섬’ 근처에는 또 다른 관광지인 ‘큰엉해안경승지’가 있습니다. 아침에 갔던 섭지코지만큼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서귀포 지역의 여러 폭포들과 더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렸던 탓에 사진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한반도 모양으로 우거진 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한쪽은 바다, 반대쪽은 리조트와 호텔이 있는 풍경이었어요. 가족들과 함께 온다면 아예 이쪽으로 숙소를 잡고 며칠 머무르며 쉬다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바다와 나무, 산책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취향에 맞는 곳이었거든요.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길을 나서봅니다.


큰엉해안경승지. 숲과 바다의 조화


원래는 전날 만춘서점 사장님께 추천받은 ‘이승악오름’에 갈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일정을 변경합니다. 그 고장의 특색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장소는 전통시장이죠. 숙소로 가는 길 중간에 있던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에 들렀습니다.  귤, 한라봉, 천혜향, 카라향 등의 다양한 주황색 과일들과 신선한 횟거리들, 특색 있는 간식거리들을 파는 가게들이 눈길을 끕니다. 저도 저녁으로 먹을 횟거리와 간식, 간단한 기념품을 샀습니다. 슬슬 해가 저물 시간이 다가왔고, 마지막 숙소를 향해 차를 몰아갑니다.


눈길을 끄는 특색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제주스테이 비우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상의 복잡함과 상념을 털어내고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숙소입니다. 서귀포에서 가장 큰 관광단지인 중문단지 근처에 있지만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야지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3박 중 가장 비싼 숙소였기에 마지막까지 예약을 할지 말지 망설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휴가인데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하는 생각에 예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띄고 싶진 않지만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닌’ ‘비우다’에 도착하자 사장님께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셨어요. 숙소의 컨셉에 맞게 TV가 없다는 점, 음식 취사가 불가한 점, 그리고 정숙하게 지내주실 것 등이 그것이었어요. 저는 그래서 오히려 더 좋다고 대답해드렸고, 곧 제 방을 안내받을 수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외장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숙소 내부는 한옥 느낌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TV 대신 책장에는 취향에 맞게끔 고를 수 있게 책들이 있었습니다. 침대 또한 프레임 없이 매트리스만 놔둔 것이 마음에 들었고요. 상대적으로 비싼 숙소답게 어메니티와 청결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샤워를 하며 여독을 풀고 해가 지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잠시 읽었습니다. 3박 4일간의 여행 중 벌써 3일째가 끝나가고 있었고, 그동안 들렀던 곳들을 한 번씩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다음에 제주를 온다면 어디로 올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번의 여행을 생각할 만큼 제주도는 매력적인 곳이었어요.


제주스테이 비우다. 천천히 걸으며 비우는 시간


시장에서 사 온 회를 먹으며 분위기에 맞춰 술도 한 잔 했습니다. 어느덧 해는 넘어가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숙소의 주변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잠을 청하기 전에 숙소 앞의 정원을 잠시 산책하며, 그동안의 여행에서 나는 일상으로는 달래지지 않는 허전함을 ‘채우려고만’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허하다고 여겨왔던 마음은 사실 온갖 스트레스와 피로로 포화상태였음에도 말이죠. 쉼 없이 달리다 숨이 차면 잠시 멈춰서 숨을 골라야 하는 것처럼, 폐활량에 맞게 적당히 채우고 적당히 비우는 요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곳 ‘비우다’에서 허전한 마음을 채우지 않고 조금은 ‘비워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고, 마음의 공간에 여유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깨닫게 됐습니다.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어느덧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이 되었네요. ‘제주스테이 비우다’는 숙소로 운영되는 ‘비우다’와 식사와 커피를 할 수 있는 ‘채우다’라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본격적인 식사는 어렵지만 간단한 조식 메뉴가 있다고 하여 예약할 때 미리 체크해두었습니다. 조식을 먹으며 정원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시간이 평화로웠습니다. ‘채우다’의 공간 이름이 ‘채우다’인 이유는 허기를 채우는 의미도 있지만 이곳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마음을 채우는 의미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저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지만, 밤의 ‘비우다’에서 마음을 ‘비우고’, 아침의 ‘채우다’에서 어제 비웠던 마음의 공간은 사실 ‘여유로 채워진’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던 숙소 ‘비우다’를 나서 발길이 닿는 대로 마지막 날의 시간을 채우러 떠나봅니다.


비움의 밤을 지나 채움의 아침. 마지막 날의 일정을 채우러



제주 여행기 마지막 편으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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