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육지, 환상의 섬.
3편에 이어..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제연 폭포’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아침은 산책도 할 겸 천제연폭포를 가는 것으로 시작해봅니다. 3개의 폭포가 줄지어 내려오는 천제연폭포는 세 폭포의 느낌이 각각 달랐어요. 비가 올 때에만 물이 떨어지는 탓에 폭포수를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넓고 웅장한 모습의 제1폭포와, 여름 계곡에 가면 느껴지는 시원함이 느껴지는 제2폭포, 그리고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제3폭포까지. 쾌청한 날씨에 땀을 흘리며 걸은 끝에 만나는 각 폭포들의 얼굴은 다채로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체온이 1도는 떨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고,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 애월에 있는 ‘호탕’이라는 가게로 향하기로 결정합니다. 원래는 여행 첫날에 가려고 했지만 월요일 휴무라는 사실을 몰랐던 탓에 가지 못해 아쉬웠던 곳이었어요. 첫날의 밤을 보냈던 애월에, 그렇게 마지막 날 다시 도착합니다. 제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3박 4일이라는 짧은 일정에 어찌 다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나름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찾은 애월 바다는 첫날 저녁에 만났을 때와는 어쩐지 느낌이 달랐습니다. 호탕에서 슴슴한 맛의 고로케와 새우완자탕면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와 깔끔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곳이었어요. 오후가 되었고, 어느덧 시간은 제주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갑니다.
혹시 모르는 사고로 비행기 시간에 늦을까 싶어 미리 공항 근처로 차를 몰았습니다. 탑동해안을 따라 걸으며 3박 4일간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어요. 기대했던 만큼의 여행이었던가,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제주도가 왜 우리나라 최고의 여행지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육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에 삽니다. 도시에서는 빠르고 편리한 생활이 가능한 반면, 여유롭고 한적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각박하고 피곤한 곳입니다. 네모나게 획일화된 집들에서 많은 사람들에 치여가며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도시 사람들 누구나 마음 한편엔 ‘언젠가는 한적한 시골에서 여유 있게 살아가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제주도는 그런 도시 사람들에게 ‘너무 어렵지 않은 시골살이’에 대한 환상을 느낄 수 있는 섬이라고 느꼈습니다. 육지에도 물론 산이며 바다를 끼고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좋은 시골이 있지만, 오랫동안 도시의 편리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 편리함을 많이 포기하지 않고도,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선에 있는 곳이 바로 제주라고 생각해요. 제주도가 ‘환상의 섬’이라고 불리는 이유,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온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마지막 날엔 역시 기념품을 사는 것이 여행의 마무리로는 최고의 선택이죠. 탑동에는 부산에는 없는 ‘프라이탁’ 매장이 있습니다. 저도 아이패드용 파우치와 카드지갑 하나를 구매했습니다. 재활용으로 만드는 제품의 특성상 하나하나 제품마다 패턴과 색상이 다릅니다.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정했어요. 눈여겨보고 있던 브랜드였는데 제주 여행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만족했습니다. 부산에도 매장이 하나 생긴다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소품샵 겸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더 아일랜더’가 있습니다. 파란색 간판도 상쾌한 느낌이고 제주도만의 특징이 있는 귀여운 소품들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저도 몇 가지의 소품을 구매하고, 한라봉에이드를 마시며 조금 쉬었어요. 어느새 비행기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더라고요. 계획했을 때와는 달리 가지 못한 곳도 있고, 미리 알았더라면 가봤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곳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곧 다음의 제주 여행에 대한 기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만족했던 여행이었고, 다시 오게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시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환상의 섬’입니다. 조금은 느슨하고 느긋하게 걸어도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곳이랄까요. 액티비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자연을 벗 삼아 여행하는 캠핑족에게도, 화려한 도심의 바다도, 소소하고 조용한 바다도 이곳 제주에는 모두 있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는, 각자의 느린 발걸음을 맞춰주는 사려 깊은 섬이라고 정의해봅니다. 첫 제주여행에서 ‘맛만 본’ 저는 벌써 다음의 제주 여행을 생각합니다. 다시 찾아야 할 곳과 처음 만나볼 곳들이 벌써 기대돼요.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제주도만큼은 누군과와 같이 하는 여행도 분명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제주도 여행이 4월 26일부터 29일까지였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음에도 다시 사진첩을 꺼내어보고 기억을 곱씹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저에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무력감’이라는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지금의 세상에서 잠시 일상의 바깥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꼭 물리적으로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지요. 일상 안에서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던 ‘나 자신’에 대한 진단을, 여행을 통해서 저는 많이 깨닫고는 합니다. 불안의 원인이라던지,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어떤 것인지 같은 평소엔 너무나 모호해서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물음표들. 모순적이게도 일상을 잊으려 떠난 곳에서 다시 일상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정도는 해답을 얻게 됩니다.
예전에는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일상에서의 도피’라고 단순히 여겨왔습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일상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숙명을 타고난 탓에 우리는 일상을 ‘잘 살아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는 알기 힘든 그 ‘잘 사는 방법’을 알기 위해, 저는 일상을 떠납니다. 저에게 여행은 다시 돌아갈 일상을 고귀하게 누리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여행을 꿈꾸고, 환상합니다.
*제주도 여행 중에 찍었던 사진들 중에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 사진들도 있습니다. 노출도 엉망이고 흐릿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사진들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