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만뒀을까?
들어가며
개인경험은 필연적으로 이기적 편향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영지'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솔직하게쓰되 너무 이입해서 편협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영지"는 누구람? 하는 분들께 미리 양해말씀 전합니다.
하나의 브랜드로 3개의 회사가 역할을 나누어 함께했다. 제품의 크리에이티브한 영역, 투자유치 영역 그리고 전반적인 운영과 판매 유통 부분을 각기 담당했다. 영지가 속한 회사는 마지막이었다. 무엇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늘 회의가 길어졌다. 외부 투자자 중 한 명이 영지가 속한 회사의 주주 관계 및 결정 권한 등의 조직 관계도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영지의 답변을 듣고 투자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반적이지 않네요.”
입사하자마자 영지는 현금흐름표를 작성했다. 신생 법인이라 매출 없이 지출만 있는 상황이니 현금흐름표가 단순했다. 며칠 뒤 일주일에 한 번씩 제품 제작에 관계하는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이슈를 정리하고 회의록을 전달하는 일종의 PM 역할을 추가로 맡았다. 내용물 제조업체, 향료 업체, 튜브 업체, 일반 용기 업체, 단상자 업체 등. 생각보다 많은 이해관계자를 확인하며 자신이 파악해야 하는 사항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영지는 체감했다.
사장은 다른 주주들이 속한 회사 사이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영지가 생각하기엔 불필요한 힘겨루기를 지시했다. 카톡으로 스크립트까지 작성해 보내주고 영지가 상대방 회사 대표에게 말하라 지시했다. 갈등을 유독 싫어하는 영지가 가장 싫어하는 업무였다.
이따금 자신의 지인에게 선물을 보내라 지시했다. 카드를 꼭 동봉하라며 손 글씨 말고 컴퓨터로 출력해서 보내기 전에 자신에게 확인받고 몇 날 몇 시에 그리고 어디에 도착해있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편이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 실수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데드라인이 촉박한 채로 업무가 넘어오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긴장을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또 며칠 뒤 시간이 곧 돈이라며 제품 출시 일정을 앞당기라 영지를 닦달했다. 연관된 업체도 모두 일정이라는 게 있으니 무작정 앞당길 수는 없다 사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비용 절감과 이익 증대라는 아주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영지의 보고를 일축했다. 그리고 제조업체를 찾아가 제조 기간을 직접 협의해오라 추가 지시했다.
또 며칠 뒤 판매 채널을 확보하라는 업무지시를 받았다. 아직도 제품이 나오기까지 일정이 빠듯했다. 목업 이미지를 만들어 주요 백화점 MD에게 메일을 보내고 입점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품을 실제로 보고 입점 진행을 하겠다며 제품이 나오면 다시 연락하라고 답변했다.
또 몇 달 뒤 론칭 파티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과거 영지의 일 경험으로 이 정도 규모 행사라면 대행사가 주어진 예산안에 이벤트를 운영하는 방식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장은 전문 대행사가 아닌 다른 회사 소속 직원들에게 행사를 준비시키고 영지에게는 불필요한 비용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고 지출하라 지시했다.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장이 말하는 불필요한 비용에 대한 기준을 알아내기 위해 영지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지난한 가격 흥정을 벌여야 했다.
테이블보 사장, 커트러리 렌털 사장 그리고 스콘 사장과 각각 세금계산서 발행 일자와 입금 일정을 협의했다. 무전기 업체 사장과 전화로 퀵 비용 지급 건으로 싸우면서 1명의 일용직과 3명의 프리랜서 계약을 하고 각기 다른 인건비와 원천징수 비용을 계산했다. 그 와중에 행사 전날 행사장에 늦게 도착한 제품 때문에 애를 먹으며 사장이 매일 11시 전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던 현금흐름표와 통장 잔고를 캡처해서 카톡으로 보고를 마쳤다. 홈페이지 주문 내용을 확인하고 송장 번호를 받아 다시 입력하는 일을 매일 아침 반복했다. 난이도는 낮지만 사람 손을 많이 타는 작업이라 실수할까 봐 늘 신경 쓰였다. 회사 홈페이지에 고객센터 연락처가 영지의 개인번호로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객 문의도 수시로 받았다.
회사에 소속된 직원은 영지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이 처리하기에 업무 가짓수가 많은 편이었다.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다양하고 동시다발적이며 이따금 예상치 못한 일들이 빈번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지는 이런 일들에 익숙한 편이었다. 자기 직전에 내일의 할 일 목록(to do list)을 세우고 출근해 하나씩 지워가는 일이 되려 영지에게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침대에 누워 내일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문제는 일이 아니라 빨갛게 떠 있는 수십 개의 카톡 알림 때문이었다. 영지가 “네" 혹은 “알겠습니다"의 답변을 달지 않을 경우, 사장은 자신의 지시 사항에 답장으로 달린 물음표와 느낌표를 달아두었다. 밤새 무음으로 해뒀던 카톡 앱을 아침에 열어보며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반복해서 받는다.
대표의 심중을 영지는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과거 한번 일해봤던 경험 때문이었다. 카톡을 보낸 시간대가 주로 새벽인 것을 보며 사장이 대략 얼마큼 조급하고 불안해하는지 가늠했다. 이렇게 저절로 알게 되는 상대방의 감정이 영지는 늘 귀찮았다.
영지가 실시간으로 답변해도 정작 사장 본인이 정신없어 확인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사장 자신이 인지할 때까지 말해달라고 영지에게 지시했다. 사장은 영지에게 그 정도는 알아서 해도 된다고 할 때도 있었다. 통계적으로 그런 날은 카톡방에 물음표나 느낌표 답장이 없는 날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는 날은 사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 사장은 일하며 감정을 끌어드리지 말라고 영지에게 충고했다.
행사 전날 퀵으로 받기로 한 제품이 행사장에 3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영지는 장소 담당자 눈치를 보며 사정에 사정을 더하고 있던 찰나였다. 자신의 명함을 챙겼냐는 사장의 전화를 받고 영지는 코앞에 닥친 문제에 비해 사장의 명함 준비 여부는 사소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챙기겠다고 단답으로 응대했다.
사장은 갑자기 론칭 행사의 주인이 누구냐 물었다. 너무 의외의 질문이라 대답을 머뭇거리던 영지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론칭 행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사람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크리에이티브를 총괄하는 대표로 하여금 내일 행사에 초대된 주요 업계 관계자 및 인플루언서들에게 자신을 직접 소개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지금 당장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사업자 등록상 대표가 알려지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그들은 신제품을 더 궁금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통해 굳이 지금 당장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장의 조급함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 사장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과거 함께 일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늘 난감했던 영지는 사장의 마지막 코멘트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만다.
"태도 주의해요. 업무 지시하는데 태도가 왜 그래요?" (to be continued)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 레퍼런서 Ⓡ박지영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 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