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 박지향
근대성의 출처를 파고 또 파다 보면 종국엔 항상 영국 문화, 영국 역사, 영국의 산업 혁명, 영국 지식인들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게 좋든 실든 뿌리인 것 같아서. 그래서 읽어 본 책. 영국의 posh한 소프트파워가 당최 어디서 나온 건지 생각하게 한다.
영국을 의인화한 인물 존 불에서 시작해 브리타니아(로마인들이 잉글랜드를 만들 때 부르던 이름), 엘리자베스 1세, 처칠 등을 소개하면서 시작하는 영국인의 ‘표상’에 대한 신화적 해부가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그 지점들, 영국성에 대한 겹겹의 층위들은 동양인 여성인 내가, 상당한 괴리감과 이질감을 어쩔 수 없이 (대중문화/교육에 의해) 이상적 가치로 내면화해 온 ‘서구 백인 남성’의 구체적인 실체, 형질을 보게 만든다.
스포츠란 개념을 만든 것도, 축구, 골프, 테니스 종주국도 영국이다. 일찍이 해군에 의존했고, 빨리 탈군사화됐고 농업 상업적 성취가 일렀던 영국이 세련된 삶의 방식을 찾고자 고안해 낸 것이 스포츠다. 영국인들 인터뷰를 보면 유달리 피지컬 헬스를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 사립학교 중심으로 형성된 스포츠정신의 확산, 이를 통한 여흥 문화가 영국 문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새뮤얼 스마일스를 비롯한 빅토리아 시대 사회개혁가들이 ‘풍부한 신체적 운동’을 해야 노동자들의 인격 형성과 기율에 도움을 준다고 거듭 주장한 것도 영향을 줬는데 이건 자본주의적 노동윤리를 강화하는 데도 주효했다. 노동자 남성의 소속감과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스포츠가 서브컬처에선 거의 ‘부족주의’화 돼 훌리건 현상을 낳은 점도 짚는다. 다만 운동경기의 체계화를 시작한 민족으로서 자기통제, 기율, 협동, 단결 정신, 끈기, 페어플레이 정신이 사회전반에 자리 잡고 그것이 여흥의 핵심이 된 것, 몸/정신의 이원화보다는 신체의 활력을 중요시하게 된 맥락을 보면, 근대인으로서 선구적으로 성취한 것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브리티시 젠틀맨의 기원도 파헤치는데 영국 중간계급 이상 남성은 영국 신사의 이상을 표지로 삼도록 교육을 받는다. 영국인은 공민으로서 의무와 노력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하고 이는 기독교적 남성성과 더해지고,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여기에 ‘스파르타 정신’까지 가미되는데, 이거야 말로 ‘슈트를 입은 지구상의 모든 남성’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향의 기원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대되는데 그 모든 것의 시작지점이 어쨌든 영국이다. 이런 신사다움의 가치는 명문 사립학교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옥스퍼드는 1214년을 기원으로 잡는데 옥스브리지(케임브리지와 합친 말)의 태동 과정에 대해서도 다룬다.
무엇보다 ‘영국성’의 중요 구성 가치로 인식되는 충성, 정중함, 세련됨, 과묵, 예의, 실용주의, 경건함, 금욕(감리교), 질서, 교육, 자존심, 자기수양(숙련 노동자), 자조와 독립, 도덕성과 공공성에 대한 헌신 등등 근대화의 중핵을 이룬 가치에 대해서 숙고하게 만든다. 산업 혁명의 첫 스타트를 끊어서, 섬 나라로서의 독특한 민족성을 잘 활용해서, 프랑스를 타자로 삼으면서 발전해와서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영국이 먼저 근대국가로서 선취해낸 것들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든다. 뉴턴,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찰스 다윈,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오스카 와일드, 다니엘 디포 등등에 대해서도. 처칠은 더 공부해보고 싶어졌다.
요즘 꽂혀있는 주제는 생뚱맞지만 ‘근대화’다. 아직도 여전히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큰 공기는 근대성이란 걸 부정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특히 나 스스로 근대화의 가치들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고, 그 경계지점이나 내외부를 제대로 꿰뚫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탈식민, 해체, 구조주의를 말하기 이전에 언어, 학문, 사고, 규범, 체제, 생각의 모든 기원이 처음 흘러들어온 지점으로 찾아가다보면 귀결점이 늘 근대다. 능력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것들의 시작점도 찾다보면 영국이다. 그래서 영국에 더욱 관심이 생겼다.
*전원적 잉글랜드 형성에 대한 전후 역사도 흥미로웠다.
*자유를 사랑하는 개인주의자, 경제적 번영을 제 힘으로 일구는 자는 ‘두발로 서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책임지고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다. #박지향 #영국적인너무나영국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