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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자 Sep 13. 2024

페페페페

나의 남은 삶의 지표는 가끔 알코올에 빠져 똑바로 서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들어야 한다는데 철이 들면 녹슬어 버릴까 봐 철들 생각이 없나 보다.


Fe, Fe, Fe

Fe, Fe, Fe



8월 무더웠던 어느 금요일

17:00

본사 출근 예정이 없던 그날. 무엇에 홀린 듯 본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 김 부장은 자식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듯 치킨, 피자, 회를 주문하느라 분주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모르는 회사 행사가 있나?'라는 궁금증은 있었지만 김 부장에게  묻지는 않았다. 입사한 지 2년이 지났지만 김 부장과는 사적인 얘기도 한 적이 없고 회식자리도 해 본 적이 없어 먼저 말 걸기가 어색했다. 그때 다른 팀 김 대리에게 카톡이 왔다.


김대리: 차장님, 오늘 시간 되시면 6시에 2층 회의실로 오세요. 대표님께서 시간 되시는 분들 계시면 한잔하시자고 해서요.
나: 저는 다음에. 오늘은 패스
김대리: 넵. 그럼 다음에 저희끼리 한잔해요.
나: ㅇㅋㄷㅋ


딱히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공식적인 회식자리 이외 회사 직원 간의 술자리는 되도록 피했었다. 공식적인 회식도 꽤 많은 회사이기에 사소한 술자리까지 챙기다 보면 내 간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며 다른 직원에게 걸리지 않게 퇴근할 궁리를 했다.

그런데...... 직속 부하 직원에게 카톡이 왔다.


OO님: 차장님, 육회도 있답니다. 한잔하시고 가시죠.
나: 애들한테도 얘기 안 하고 와서 오늘은 패스하겠습니다. 대리비도 비싸고.
OO님: 대리비! 제가 만원 보태겠습니다. 오래간만에 같이 드시죠.
나: 제가 어찌 OO님의 귀한 돈을 쓰겠습니까. OO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아무래도 오늘은 마시고 가야겠네요.


대리비를 보태겠다는 OO의 귀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가방을 대충 싸고 2층 회의실로 갔다. 그 자리엔 대표, 부사장, 전무, 김 부장, 장 부장, 김대리 그리고  OO가 앉아있었다. 나에겐 우리 팀인 OO과 김 대리를 제외하고 모두 대면 대면한 사이라 한쪽 끝에서 조용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부사장은 어느 산을 가봤냐, 트레일 러닝 할 때 어느 브랜드 신발을 신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왕복 몇 시간을 달리냐 등등 이것저것 물어봤다. 사실 김 부장만큼 부사장도 친하지 않다. 하지만 술기운 때문이었나, 그날은 그의 질문에 술술술 대답하며 심지어 질문도 했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 술술술이 맨 정신이 아닌 술에 취한 정신 상태였다는 걸.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91%가 'I'성향인 나는 멀쩡한 상태론 낯선 사람은 당연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짧은 대화조차도 이어가지 못한다. 괜히 책상 위를 닦거나 제일 끝자리에 앉는다. 오랜만에 약속이 생기면 좋지만 당일에 취소되면 더욱 좋아하는 나다.


시간 모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분명 2층 회의실에 앉아 있었는데 눈을 뜨니 회사 실외 주차장 턱에 앉아있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을 탔다면 이런 기분일까. 앉은 채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김 부장과 김대리가 내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김대리: 차장님, 괜찮으세요?
김 부장: 차장님, 일어나실 수 있으세요?
김대리: 차장님, 대리기님은 부르셨죠?
나: 네네네네네. 아..... 죄송해요. 저 알아서 갈게요. 어서들 가세요
김대리: 대리기사님 오시면 갈게요. 차까지 걸으실 순 있죠?
나: 아..... 죄송해요. 잠깐만 앉아있을게요. 정말 죄송해요
김 부장: 저기 대리기사님이세요?
나: 저 갈게요. 정말 죄송하고 감사해요.


취한 주제에 부끄러운 건 알았는지,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냅다 차 뒷좌석으로 뛰어갔다. 오래간만에 죄송과 감사를 남발하면서 말이다. 본사에서 집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가는 동안 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술이 조금 깼다. 대리비를 송금하고 집까지 잘 들어갔다.


그다음 날 토요일

09:00


전날의 진상 맞던 행동에 비해 숙취 없이 잘 일어났다. '잘 들어가셨죠? 걱정되네요.'라는 김 부장의 메시지, '차장님 별일 없이 잘 가셨죠?'라는 OO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답 메시지를 보냈다. 문제는 통화내역이었다. 아. 뿔. 싸.


22:56 장 OO부장 취소 01초

22:58 OOO부사장 착신통화 20초


그들에게 전화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장 OO부장에게는 전화만 했지 통화는 안 된 거라 다행이지만 OOO부사장 착신통화는 내가 전화를 걸어 뭔 얘기를 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왜 전화를 했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20초면 어느 정도 시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확인차 스터디 카페에 간 큰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꽤 길게 통화했다고 생각했는데 끊고 확인하니 16초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20초는 별 얘기 다 해도 남을 시간이었다.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부사장과는 연락할 일이 없는데, 그 밤에 20초 동안 무슨 얘기를 했을까. 생각할수록 창피하다. 잔잔했던 내 마음의 바다에 창피함이라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 바람은 불안함이라는 거센 파도를 불렀다. 거센 파도는 종일 쉬지 않고 쳤고 울렁거림에 없던 숙취도 올라올 것만 같았다.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톡이라도 보낼까?, 김대리한테 큰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물어볼까?, '아니야. 이번 휴가 끝나면 그냥 퇴사하자.'


혼자 끙끙 앓다가 저녁때 남편에게 얘기를 했다. 남편은 이제 나에게 술 먹자고 하는 직원들은 없을 거라며, 자발적 왕따가 된 걸 축하한다며 히죽거렸다. 나를 놀리느라 신난 남편의 얼굴을 머리로 확 받아버릴까 했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라 꾹 눌러 참았다. 다행히 주말부터 수요일까지 여름휴가라 월요일에 바로 출근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되도록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해도 휴가 내내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술자리는 되도록 피하고 하게 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자리를 일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면 뭐 하나. 한순간 뭐에 홀려 이지경이 되는데. 난 언제 사람이 되려나. 개도 늙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된 것 같다.



그 주 월요일, 휴가 첫날

09:30


그날 일은 뭉개고 넘어가기가 찜찜했다. 김대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나: 대리님, 지난번 저 챙겨주셔서 고마웠어요. 그날 제가 실수를 많이 했네요. 나이 들수록 그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제가 다른 분들께도 실수 한건 없는지요? 정말 부끄럽네요.'

김대리: 안녕하세요. 괜찮습니다. 조심히 가셨으면 됐죠. 휴가 재미있게 즐기세요.


김대리의 답 메시지에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이모티콘으로 답을 대신했다. 열아홉 살이나 어린 김대리였지만 '괜찮다'는 답에 내 마음의 바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블랙아웃: 과음으로 인한 단기 기억 상실 현장을 이르는 말이다. (출처: 네이버)
지나친 음주는 몸에 해롭습니다.



#블랙아웃 #진상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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