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5.

데자뷔와 같이 찾아온 영화 '프란츠'

by 황정현

이유 없이 무언가가 강렬히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진한 초콜릿같이.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아주 강렬하게, 주체할 수 없이 그것을 원할 때가 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안다. 음식뿐만 아니라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일까. ‘프란츠’라는 영화를 보고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때리는 강한 충격에 한동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떤 음악과 영화는 폭탄이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영화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고 녹음해두었던 쇼팽의 연주곡이 영화 속에서 몇 번이나 흘러넘쳤다. 가슴이 철컹 내려앉으며 데자뷔와 같은 운명감을 느꼈다. '아, 나는 이 영화를 봐야 했고 나에게 필요한 영화였구나.' 영화를 보기 전,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스스로 원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해서 음미했다. 영화를 통해 나는 막연히 그 슬픔의 정체를 그려본다. 육체에 갇힌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슬픔이었을까. 그 밀도 높고 찌질하고 더럽게 질척거리는 슬픔 말이다.


살아감이란 지각과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지어가는 과정 같다.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살아있다면 살아간다면 필연의 과정인 것이다. 차곡차곡 그 세계를 지어가다 보면 인간은 자신이 지닌 한계로 늘 자신이 지은 세계 안에 갇혀버린다. 내가 견고하게 지어온 세계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 찾아드는, 멍한 현기증을 기억하는가. 갑자기 맥이 풀리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귓가가 먹먹해오는 그 느낌 말이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 잘기 잘기 찢기는 것 같은 망연자실함을 말이다.


현실은 늘 그렇게 우리를 배신한다. 그 남자가 사랑했던 프란츠의 친구가 아니라 그의 심장에 총을 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사랑했던 프란츠를 죽인 남자를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용서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그 남자를 찾아갔지만, 그 남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아니 현실을 뛰어넘을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된 지금,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된 순간. 온전히 맞춰지지도 않는 이 알 수 없는 현실의 조각들, 삐걱거리는 어긋남이 우리의 가슴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남긴다.


그러나 삶은 지속되고 그 안에서 결국 어떤 선택이라도 감행된다. 살아있다면 루브르에 가지 않아도 누구든 마네의 그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림을 응시하며 누군가는 죽음을 누군가는 생의 의지를 선택할 것이다. 안나또한 마네의 그림 앞에 서있다. 나는 생각했다. 안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 그 자체에 배신당했지만, 모든 것이 갈가리 찢겨졌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픔으로 인해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프란츠와 그 남자 아드리앵,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으로부터 말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그녀는 백지와도 같은 자유함,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용기를 장착하게 되었다. 선택 후에도 때때로 주저앉고 깊은 슬픔 안에 갇히겠지만 그녀가 또다시 선택하는 한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이라도 다시 그려질 것이다. 마네의 그림을 마주하며 생의 의지를 선택한 안나의 결연한 눈빛이 가슴을 파고든다. 쇼팽의 연주곡이 가슴에 파고든 건, 결국 깊은 슬픔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한 자유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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