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아 May 13. 2024

도착

어린 시절 유학을 꿈꾸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일단 하고 보자는 나의 성향은 철저한 검증 끝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멀어졌던 유학의 꿈은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오르면서 다시 내 안에서 피어났다. 옆을 보니 아직 둘째가 있었다. 그렇게 나의 꿈은 다시 유예기간에 접어들었다. 큰 고민은 없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였고 엄마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사춘기 아들의 고교시절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흘려보냈을 뿐이다. 어쩌면 아무도 직접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저 나 스스로가 정한 시한이라는 것이 무의식 중에 존재했다. 내가 가진 용기는 그 정도였다. 사실 그 마저도 막상 실행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회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가야 하는가?’

 

입학에 필요한 절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복잡하고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것들이었다. 이탈리아 유학이 까다롭다고 소문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외환계좌를 만들기 위해 은행에 방문했다.

“자녀분 서류 주세요”

“자녀가 아니라 제가 갑니다”

“아, 죄송합니다. 대부분 자녀분 계좌를 개설하셔서요.”

나의 신분증을 보고 은행직원이 생년월일을 확인한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다.  

‘지금 떠나도 되는 걸까?’

유학을 위한 모든 절차가 거의 진행된 상황에서도 이 질문은 계속되었다.

굳이 왜 떠나야 하나.

 

밀라노에 도착한 첫날,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서 너 시경 나는 숙소 앞에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 LTE도 WIFI도 연결이 안 되었던 날, 캄캄한 저녁 낯선 거리의 한 길가에 커다란 가방 두 개를 옆에 두고 나는 열쇠를 건네주러 온다는 부동산 직원을 기다렸다. 바로 옆 메트로역을 향해 사람들이 오가고 건너편 정거장에도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디론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온오프라인이 완전히 단절된 세상에서 홀로 버텨야 하는 60분의 시간이 너무나 아득했다. 멍한 정신이었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거리에서 최대한 몸을 꼿꼿이 세웠다. 나는 순간 내가 철저히 혼자이며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것도 밀어닥쳐오는 이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순간을 직면해야 했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온전히 나로서 채워야 했다. 그동안 손쉽게 회피해 왔던 외로움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그 순간들을 지나가려 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대상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직 나 만이 나의 빈 곳을 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며 그 후에야 타인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왔구나 드디어.

안녕, 잘 지내보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경계심을 늦추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면 아직 답을 못하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되물으면 이렇게 밖에는 답을 못하겠다.

만약에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밀라노유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