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어디 좀 볼까?
V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이 분과 함께 했던 Design Formation이라는 수업은 내가 이곳에 와서 참여했던 모든 수업 중에 (아직까지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은 항상,
“알로라 Allora”
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하셨다. 이번 세션에는 운 좋게 그룹이 아닌 개인 프로젝트로 수업이 진행되어서 온전히 나의 작업을 선생님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알로라”는 이탈리아 말로 “그럼” “그러면” 이런 뜻인데 대화를 시작하거나 다음 주제로 넘어갈 때 주로 쓰는 말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영어로 강의를 하시지만 이런 추임새는 이탈리아어도 간혹 하셨다.
“알로라”라는 말 이후에는 언제나 한 주 동안 내가 나의 작업에 대해 고민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어떻게 작업했는지를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이 “어디 한 번 볼까? 자 너희들 작업을 좀 보자.” 이런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작업을 시작하거나 생각의 전환을 위해 분위기를 좀 바꿔보고자 할 때 마법의 주문처럼 “알로라”라고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생각이 막히거나 도저히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작은 것을 디자인한다고 해도 뭔가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야 하는 디자이너의 운명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꽃병을 디자인하라는 주제가 생겼다고 하자.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바로 핀터레스트 PINTEREST에 들어가 꽃병을 검색하고 자기의 작품에 적용할 디자인을 찾고 있다면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가? 우리는 이런 방식에 익숙하다. 남들이 하고 있는 것, 남들에게 이미 인정받은 것, 익숙한 것, 좋아 보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 되었다.
“알로라”
어떻게 해야 할까? 오리지널리티 Originality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생각하고 경험하고 감각으로 느낀다.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 것은 흘려보내며 또 어떤 것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디자이너는 외부와의 소통에 예민하다. 두 사람이 길을 걸어도 한 사람은 길 가에 홀로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양귀비에 반응하고 걸음을 멈춘다. 이 아이는 왜 이 잡초들 사이에 홀로 피어 있을까? 다른 양귀비들은 뒤편에서 다른 들꽃들과 어우러져 춤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너의 씨앗은 가벼워서 바람을 타고 더 멀리 왔구나. 너는 홀로 다른 것을 보고 있구나. 그는 자연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바람에 흩날리는 양귀비 꽃잎이 그의 마음에 떠다닌다. 누구보다 멀리 가보고 싶었던 양귀비 꽃은 한 동안 여기 머물러 있다가 언젠가 또 씨앗이 되어 더 멀리 날아갈 것을 상상해 본다.
누구나 자신 안에 자신만의 감정, 욕구,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나는 이곳에 와서 세계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작업을 하면서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고 특별한지 보고 있다. 각자 안에 품고 있는 서로 다른 감각들은 충돌하고 부서진다. 나는 그것이 불편한 아름다움이라고 느꼈다. 그 다름을 자신만의 모양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음을 좋게 바라봐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끝장을 내는 것이 아니라 홀로 다르게 피어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라봐야 한다. 그들은 세상과 자신사이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이다.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 안에 내재한 것들이 세상(풍경, 예술 작품, 현상, 사건, 사람…)과 만나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함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것으로 나의 삶을 채우면 아무리 채워도 충만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꽃병을 디자인하려면 핀터레스트에 핀 꽃이 아니라 들판에 피어 있는 야생화와 대화해야 한다. 자꾸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가만히 응시하고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한다.
#밀라노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