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빴던 학기를 마치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난다. 일찌감치 끊어 놓은 비행기 티켓과 숙소 예약이 내가 준비한 전부다. 출발하기 전날, 스톡홀름의 대중교통수단과 공항에서 호텔까지의 이동방법을 찾아보았다. 꼭 들러야 할 박물관과 미술관, 유적지를 살펴보고 현대 건축물과 공예용품점을 찾아보았다. 중심가에 호텔을 정한 덕에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걸어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테 막상 떠나려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외로움이 밀려온다. 혼자 여행을 떠나려면 관심과 사랑을 자급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실천은 영 답보상태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외로움을 달래줄 가족과 친구들이 늘 곁이 있었을 때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래서 뭔가 늘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타인과의 우정과 사랑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의미로,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로 존재한다는 건, 우주에 하나뿐인 그의 인격과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상대의 성향에 따라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나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누군가와는 흥미롭게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누군가와의 관계는 힘겨움에 멈추기도 한다. 그 접점을 찾아가고 만들어가는 과정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과정이다. 단지, 혼자서도 그 부족함을 채우는 경험을 충분히 해본 사람은 타인을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나를 스스로 채울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한 번은 갑자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찾아왔었다.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이 틀린 것만 같았다. 나는 어리석고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무가치해 보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데 한 번 뗀 걸음은 어딘가를 딛어야 했다. 이런 날은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찾아오며 늘 보기 좋게 나의 허를 찌른다. 그러면 나는 늘 맥을 못 추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자. 이 순간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나를 가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가만히 나에게서 빠져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지쳐있는 나를 다독였다.
얼마 전 Ted 강연을 듣다가 “샨텔 마틴 Shantell Martin”이라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와 영국 혼혈의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홀로 갈색피부에 흑인 곱슬머리였다. 그녀는 자신은 남들과 다르게 생겼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사고하는 자신, 주변과 늘 구분되는 스스로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흑인, 성소수자, 빈민계층이라는 굴레로 자신을 얽매고 있는 현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회과 관습으로부터 늘 부정당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절실한 갈망이었다. 그녀는 영국에서 일본으로 떠났고 다시 뉴욕으로 갔다. 그 여정을 통해 그녀를 해방시킨 것은 작은 펜이었다. 그녀는 펜을 통해 자신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 안에 내재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를 그림이라는 것을 도구를 통해 표출해 나가기 시작했다. 펜 끝에서 그녀의 영혼은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세상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내면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 스스로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 답을 찾으므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 매일 그 고통을 짊어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냄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누구인지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신을 만난다면 그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까뮈는 자신이 길을 잃었을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나는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고통을 느꼈다. 가보지 않은 길,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우리에게서 안정감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언제나 확실한 무언가를 원한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늘 삶이 불안한 것이다. 잘못된 상황에 봉착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늘 혼란스럽다. 일시적 안정은 가능하지만 지속되지 않는다. 그것이 두려워 삶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자유는 없다.
별거 아닌 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움직여 보는 것이 시작이다. 샨텔이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나려고 몸을 일으킨 것이 시작 어었던 것처럼. 그녀는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그 안에 저 깊은 곳에 있는 힘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 가려져 있어서 있는지 몰랐던 것들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달리는 힘이 자신을 살리고 또 일으켜준다. 자유롭게 한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거침없는 펜처럼 말이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Shantell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