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에서의 인턴 일지
내가 유학을 생각할 때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전공실기가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고 밀라노 현지의 디자인회사와 협업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디자인 책임자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수행한 과제에 대한 크리틱을 직접 듣고 계획을 발전시켜 가는 과정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룹과제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과 그것도 까마득하게 어린아이들과 한 조가 되어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 그룹과제를 하면서 느낀 것은 과제의 성패는 철저히 누구와 그룹멤버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다섯 번의 워크숍을 거치면서는 그 누구와 해도 쉽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참고 인내하고 설득하고 기다리고 절망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후련하고 뿌듯하고 후회하고 아쉬워했다. 한 번의 워크숍이 끝나면 다음을 시작하기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결국 모든 워크숍이 끝났다. 그토록 힘겨웠던 시간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벌써 저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룹과제 형식에 대해 처음부터 그리고 하는 내내 다소 회의적이었다. 석사과정이니 만큼 내가 생각하는 것을 깊이 있게 심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룹과제는 늘 아이들과 토론과 설득, 주장, 협의, 절충,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매우 유창한 영어로 논리적으로 빠르게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디자인은 시각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첫 번째 워크숍이 끝나고 그룹과제를 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우리는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회차가 거듭될 수로 나름대로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들을 터득해 나갔다. 나는 여러 인격과 만나고 부딪히고 단단해지면서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오히려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학교에서 하는 과제가 (물론 점수는 취직이나 진학을 위해서는 무시할 수 없지만) 인생의 여정을 이어 나가는데 큰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들 동안 자신의 역량을 체감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작업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면서 그것들에 몰두하는 시간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인턴기간을 거치는 동안,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 그때 자신의 관점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회가 있다. 사실 그 순간에라도 떠오르는, 아주 희미한 디자인 언어가 그려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마지막 워크숍 때 아이들은 인턴 면접을 보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나는 사실 여름 방학 전에 인턴쉽이 결정된 상태라 비교적 편안하게 과제를 할 수 있었다. 전공이 프로덕트 디자인이다 보니 학교에서 연결해 주는 회사는 프로덕트 디자인이라는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있었다. 잘못하면 내가 관심 있는 제품과는 거리가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할 확률도 꽤 있었다. 물론 학교에 요청해서 조명디자인 회사로의 연결을 기다려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내가 직접 회사를 찾아보고 이메일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나이에 인턴이라니 새삼스럽게 나이가 신경 쓰였다. 몇몇 회사에 이메일을 보냈고 그중 내가 가장 일하기 원했던 회사의 대표가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먼저 줌을 통해 리모트로 미팅을 했고 여름이 지나 직접 회사에서 대면 면접 후 인턴쉽이 학정 되었다.
면접을 보기 위해 Loreto역에 내려 회사를 찾아가던 기억이 난다. 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물 1층, 벨을 누르고 무거운 현관문을 지나 몇 개를 계단을 올라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인 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리사는 회사의 대표이지만 사업가보다는 여전히 디자이너의 마인드가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빛에 대한 철학과 접근 방식에 나는 큰 공감을 느꼈다. 아직 함께 일을 시작하기 전이라 다 알 수는 없지만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임에 확신이 있었다. 리사도 나에게 용감한 여자라며 뒤늦게 유학을 결심하고 낯선 땅에서 생존하고 있는 나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이 스튜디오에는 작은 랩(Lab)이 있었는데 계획 중인 조명디자인을 종이 등을 이용해서 직접 목업(Mock up)을 하면서 조도, 휘도, 배광들을 실험하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인턴도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고 하니 막연하게 기대감에 벅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