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에서의 인턴 일지
생각해 보니 인턴이라는 포지션으로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 옛날 나는 인턴 경험 없이 바로 신입으로 취직을 했었다. 회사를 옮기면서 대리를 달고 또 실장이 되고 사업자를 내고 대표가 되었다. 이제 나는 다시 인턴이다. 지금까지 공간디자이너로 살다가 제품디자인 공부를 했으니 인턴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제품디자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또 접근 방식도매우 달랐다. 무엇보다 학교는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늘 주어지는 곳이다. 학교를 떠나 실무에 있는 동안 나는 디자인 개념과 도면화 작업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2차원적 시각작업에 익숙해 있었다. 3차원의 작업 즉 3D 모델링은 늘 외부업체에 아웃소씽을 했기에 이 분야는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나에게 있었다. 제품디자이너가 3D 모델링을 못한다는 것은 공간디자이너가 캐드(도면화 프로그램)를 다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독학으로 준비를 하였지만 학원에 다니면서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뭐든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유학생활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룹마다 3D 모델링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어서 과제를 수행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혼자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오고 만다. 게다가 점점 디자인 프로그램이 코딩프로그램과 연결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제품디자인의 모델링에 주로 쓰이는 롸이노는 연결해서 그래스 하퍼라는 프로그램과 연동되어 활용되는데 이를 다루는 수업시간에 나는 멘털이 나가는 줄 알았다. 내가 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피했겠지만 이 수업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수업이었다. 나이 먹고 유학하는 동안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이런 컴퓨터 프로그램들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들은 아니었다. 실무는 더 하다. 어떤 프로그램을 얼마큼 능숙하게 다루느냐는 이곳에서도 통하는 취준생의 가장 기본적인 지질 중의 하나였다.
처음 밀라노에 와서 가장 기대되었던 것들 중의 하나가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실무 경험이었다. 막상 인턴을 시작하기 전의 나의 상황은 어깨수술 때문에 급작스럽게 한국에 다녀오고 재활운동을 하면서 학교의 과정을 마치느라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과연 문제없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사무실 직원들은 친절할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이 힘들면 견뎌낼 수 있을까?
출근 첫날, 오전에 모두 외근이라 오후에 출근하라는 이메일을 전날 받았다. 2:30분에 사무실에 도착, 역시 벨을 누르니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나왔다. 대표는 파리에 출장 중이라 만날 수 없었다. 키가 큰 발렌티나와 회사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중 눈에 뜨였던 것은 화장실 벽면에 쭈욱 걸려있는 작은 수건들이었다. 나는 무슨 수건을 벽에 저렇게 많이 걸어 놓았지? 생각했다. 알고 보니 직원들이 사용하는 각자의 수건이었다. 페이퍼 타월 대신 각자의 수건을 자리를 정해 놓고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제법 큰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오늘은 일단 입구 쪽의 임시 자리에 앉았다. 공용파일을 열어보니 이미 나의 이름으로 된 폴더가 있었다. 프로젝트명이 명품숍 B 청담점 계획이었다. 내가 서울에 있는 청담이냐고 되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이탈리아의 건축회사가 청담동 명품거리에 들어설 B 매장 설계 중인데 그 프로젝트의 조명설계를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발렌티나는 나에게 건물의 파사드(전면) 계획의 시안과 평면도를 보여주며 건축에서 계획하고 있는 파사드 계획에 적용할 만한 조명 이미지를 리서치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것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있는 방에는 두 명의 남자 디자이너와 한 명의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남자들은 좀 경력이 있어 보였고 여자(이름이 마리아였다)는 이제 갓 실무를 시작하는 디자이너가 아닐까 추측되었다. 하루종일 이들이 이탈리아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데 여기가 정말 이탈리아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이곳에서 취직하면 결국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지고 배울 수밖에 없다고 했던 선배님들(?)의 말이 생각났다.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열심히 콘셉트 이미지를 찾고 정리를 하였다. 퇴근 30분 전 발렌티나가 다가와 찾은 내가 이미지들을 열고 설명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침착히 설명하였다. 발렌티나는 건축회사와 곧 미팅이 있으니 이 이미지들을 가지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라고 이야기했다.
퇴근하려고 하는데 서울에서 가져온 쿠키를 깜빡하고 꺼내지 않은 것 생각났다. 쿠키를 내놓자 저마다 한 마디씩을하며 기뻐하는 기색이다. 역시 가져오길 잘했다. 내 앞에 앉은 마리아는 그리스에서 왔는데 본인도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조명디자인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인턴 마치고 이 스튜디오에서 계속 일하게 되었다고. 웃으면 이야기하는 앳된 얼굴이 영락없는 사회초년생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