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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Nov 01. 2021

제이는 왜 폭주족이 되었을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읽고, (김영하 저)

  

"여기서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먼저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났다는 의미이며, 그는 그 다음에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주의자가 정의하는 사람이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어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에서, 장 폴 사르트르 저)


고속터미널 하면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이 있다. 내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차와 밀려오는 차들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내 오른쪽 발등을 뭔가가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내 앞을 지나가던 택시의 앞바퀴가 내 발 위를 천천히 굴러 지나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저씨가 창문을 내리고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는 창문을 올리고 미끄러지듯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오른쪽 발을 쳐다보았다. 무겁게 눌린 발은 아스팔트 바닥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나는 왼발을 딛고 오른발을 움직여 보았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비스듬히 웃음을 흘리며 떠난 택시기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고속터미널의 첫인상이었다. 웃고 있지만 야비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이었다.  



   


수많은 소리가 모이는 장소, 고속터미널


 "고속터미널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꾸는 한 편의 악몽이다. 목이 쉰 기독교 광신도와 푼돈에 몸을 파는 남창, 두 다리를 잃고 찬송가를 부르는 걸인과 어수룩한 상경객을 노리는 사기꾼, 구역 없는 창녀들과 가출한 십 대들, 외계인의 도래를 믿는 신흥종교 교주와 호객꾼들, 소매치기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중에서, 김영하 저)


제이는 그 악몽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터미널 장애인 화장실의 차갑고 더러운 공간, 어쩌면 이 사회에서 출산의 장소로서는 가장 낮고 천한 곳이 그가 처음 세상과 마주한 곳이었다. 터미널 장애인 화장실에서 울려 퍼지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는 그 곁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구조요청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반응한 사람들에 의해 제이는 구원되었다.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 제이는 고속터미널 화훼상가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돼지엄마의 손에 자라게 된다. 싱싱한 꽃들이 가득한 상가의 한 구석에서 제이는 자라났다. 누군가의 탄생과 기념일을 축하하는 자리, 인생의 모든 환희와 죽음의 장소로 꽃들은 실려나갔다. 제이에게 꽃은 이 세상에 흔하디 흔한 특별함이 얼마나 자신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지를 인식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 후 제이의 놀이터는 룸살롱의 주방이 되었고 그곳에서 보고 듣는 것들이 그의 세상이 되었다. 돼지엄마가 직장을 잃고 마약쟁이와 동거를 시작하고 제이가 사는 곳이 철거촌이 되었다. 제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제이는 보육원을 나와 가출한 아이들과 지내게 된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제이가 경험한 것은 그의 주변에 머물렀던 세상의 잔혹함  속 미세하게 들리는 사람들의 고통 소리였다. 제이는 사람들의 침묵에서 폭력에서 상처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탄생과 함께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면 제이는 생명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그 센서는 어쩌면 죽음 직전에 화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제이를 죽음에서 건진 누군지 모를 그 구원자의 손에서 전해진 DNA일지도 모른다.


 


실존은 본질을 우선한다


제이는 어릴 적 다세대 주택에 살았는데 주인집 아들인 동규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 제이는 말하지 못하는 동규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통은 동규로 하여금 입을 닫게 하였고 그 고통의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던 제이만이 동규를 대변할 수 있었다. 제이가 타인에 고통에 민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이는 보육원에서 도망친 후 한 동안 가출한 아이들과 동거를 했었다. 제이를 가장 괴롭힌 것은 가정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온 아이들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서 벌이는 서로에 대한 지독한 착취와 폭력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지키지 위해 같은 처지의 친구를 다시 한번 잔혹하게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려 했고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한 자신들의 서열에 스스로 순응함으로써 악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 혼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진한 화장과, 노래방 마이크에서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 밤을 새워 몰입하는 게임의 키보드 조작음에 모든 고통을 사장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오직 제이만이 그 고통의 소리에 반응하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이가 이 세상에 내던져졌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처음 직면한 것은 자신의 고통에 반응한 사람들의 손길이었다. 그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제이의 관심은 사람들의 고통에 맞춰져 갔고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어 갔다.




아이들의 폭주 

제이는 폭주족의 수장이 된다. 폭주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다. 제이는 폭주가, 조롱당하고 천대받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목숨 걸고 배달을 하는 휴일도 명절도 없이 일하는 아이들의 외침이라고 했다. 세상을 향해,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자신들도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는 분노의 표현이라고 했다. 세상을 화나게 하려는  아이들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제이는 815 광복절 대폭주를 이끌었고,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향해 하이빔을 쏘아대며 달려드는 경찰들을 향해 내달렸다. 성수대교를 중간쯤 지나다가 오토바이가 쇠바늘형 바리케이드에 의해 펑크가 나고 난간에 처박히자 제이의 몸은 하늘로 붕떠올랐다. 아수라장이 된 다리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태어났던 고속터미널이 제이에 눈에 들어왔다. 차갑고 냉정한 세상의 문을 열어준 그곳을 바라보며 세찬 강물 속으로 제이는 사라졌다.  


나는 가끔 평일 오전에 터미널 화훼상가에 간다. 이만 원이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우리집을 행복하게 해 줄 꽃다발을 한 아름 데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은 늘 주인공의 품에 안긴다. 그럴 때마다 꽃은 사랑과 함께 오고 기쁨과 함께 온다. 꽃에는 감사가 담겨있고 그리움과 위로를 담고 있다. 그래서 꽃을 받는 사람은 행복해진다. 꽃을 곁에 두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고속터미널 화훼시장에서 자랐지만 한 번도 꽃의 찬란한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한 제이, 이제 제이는 그 모든 고통의 소리에서 벗어나 이 향긋함에 깃들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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