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 응대 노하우, 장거리 연애로 꽃 피우다 -
이제 겨우 열두 번째 글을 쓰려는데 쓸 얘기가 없다. 내가 대체 요즘은 뭘 하는고 생각해보니 연애를 열심히 하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남자친구와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전화통화를 한다. 우리는 서로 200km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장거리 커플이다.
나는 온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일하는 사람이라 퇴근 후에 전화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엔 누구와도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원래 살던 곳보다 더 먼 곳으로 장기 출장을 가는 바람에 3주간 아예 만날 수 없는 지경에 처해서 매일 전화를 걸게 됐다.
남자친구가 먼저 “오늘은 어땠어요?”하고 물으면 마지못해 “그냥 뭐 똑같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이런 일이 있긴 했어요.” 정도로 이어지던 대화가 시간이 갈수록 풍성해지고 있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해요?”, “목소리에 표정이 풍부한 것 같아요.”라는 칭찬을 들은 이후부터다. 칭찬은 고래도, 나도 춤추게 한다.
회사에서 업무량이 아주 많을 때는 너무 바빠서 전화량을 확인해보지 못했고, 그나마 덜 힘들 때 세어 본 착·발신 횟수는 일 평균 60~80통 정도였다. 이렇게 보내온 세월이 십 년이니 노하우가 약간 쌓였다. 바둑기사로 따지면 프로 1단 정도는 되지 싶다.
전화할 때는 상대의 표정과 몸짓을 볼 수 없어서 오해를 사기 쉽다. 상대방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목소리에 감정을 실으려고 애를 쓴다. 대화에도 길이 있어서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쉬운 업무처리도 어려워지고, 생각이 많은 내 성격상 감정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사무적이고 권위적이라는 핀잔을 듣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 톤을 바꿨다. 가령 정해진 인사 멘트로 내 소속을 밝히고 나서 상대방이 “○○업무 하는 데 맞나요?”하고 물으면, 명랑한 첫인상을 주고 싶어서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라고 짧고 경쾌하게 끝음을 살짝 올리면서 대답하는 식이다.
“아뇨. 그건 안 됩니다.”로 시작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살짝 빠른 속도로 확신 있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가 안 된다고 설명하고 나면, 상대방은 본인 생각에는 해줘야 맞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그럴 땐 말꼬리를 최대한 자르지 않고, “아~” 정도로 호응만 하다가 말이 다 끝난 것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안돼서요. 되는 거였으면 진작 해드렸을거에요.”라고 당신의 입장에는 충분히 공감한다는 감정을 담아서, 하지만 짧게 대답하고 상대의 반응을 다시 기다린다.
별 것 없는 노하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가 없어서 나도 매일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기’다. 비슷한 질문을 자주 듣고,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 이 일의 특성상, 그리고 전화 받는 업무 외에도 해야 하는 서류업무가 많기에 민원인과의 전화통화에 진정성 있게 집중하기가 어렵다.
ARS 자동응답기처럼 내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쭉 듣기만 해줬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심하게 바쁠 땐 소리 낼 기력도 없어서 전화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뜻으로 “네” “네” 하며 호응하는 말조차 아꼈었다. 내가 짧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면 이 전화가 빨리 끝날거라고 여기던 시절도 있었지만, 되려 내 태도를 가르치려고 들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감정을 다 쏟아내기 전에는 전화를 끊어주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존중받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내 생각과 감정이 공감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싸울 각오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간혹 있긴 한데, 대부분은 나와의 사소한 전화통화로 다투고 싶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서, 가급적 태도 면에서는 상대에게 져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남자였어도 이런 고민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한다. 내가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밝고 상냥한 태도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지속시키는데 기여하지 않기 위해서 적당한 지점을 찾아 전화 응대 방법을 체계화하고 싶다. 나는 상대에게 멋지고 품격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수많은 날들을 지나 내 재능과 노하우는 남자친구와의 전화에서 꽃피우고 있다. 전화는 온전히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책, 드라마, 영화, 강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상대방의 세계를 여행한다. 나는 이미지로 상상해보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 듣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가 이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겁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흥미진진하고 궁금한 마음이 크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요?”
“화려하게 제 재능을 뽐내면서 살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멋진 자동차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면 사람들이 막 환호하고 인정해주는 그런 이미지랄까요.”
나는 TV에서 봤던 사막 랠리를 떠올려봤다. ‘흙먼지’와 ‘환호’라니 머릿속으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쪽으로 문외한이라 그런지 그들만의 세계 같은 느낌이다. 나는 색깔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주 컬러풀한 사람을 만나버린 것 같다.
오늘은 주말이라 곧 그를 만나러 간다. 오늘도 그와 풍성하고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 좋은 대화는 좋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를 더 이해하기 위해 오늘은 어떤 질문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