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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woo Ahn Apr 03. 2019

개발자 인생 회고 #1

닷컴 버블의 시대

때는 1999년, 군대 전역을 앞두고 사회로 복귀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한참 고민했었다. 그 당시 생각했던 옵션 중 하나가 미국행이었는데, 무려 18년이 지난 2017년에야 미국으로 와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 때 미국으로 왔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당시만 하더라도, 비전공자에 대한 소프트웨어 업계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프로그래밍이야 어릴 적부터 해왔고, 전산을 부전공으로 했으며, 대학 시절에 파트타임으로 개발을 한 경력도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는 회사들이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인터뷰나 코딩 테스트도 하지 않고 서류만으로 탈락시키거나, 연봉을 후려치려고 하는 경우를 겪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IMF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던 시절이었다. 다시 대학을 가지 않는 한, 어차피 비전공자의 굴레를 벗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프로그래밍 스킬을 죽자고 파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A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당시 지원을 했던 회사 중 유일하게 전공을 따지지 않고 프로그래밍 실력을 보고 OK를 했기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군대를 전역한지 1주일 만에 나는 바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사를 한 첫 날, L부장이 부르더니 내게 과제를 하나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1주일 만에 사내에서 채팅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메신저를 만들어내라는 것이었다. 에?

당황한 마음을 추스리고 구현해야 하는 기능과 요구사항이 뭔지를 물었다. 다행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메신저 레벨은 절대 아니고, 서버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 목록을 보고, 전체 대상으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특정인을 지정해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 정도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켓 통신으로 채팅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단, 텍스트 기반이 아닌 Windows 애플리케이션이어야 하고, 사내 모든 사람들이 다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당시는 대부분 Windows 95나 Windows 98을 사용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 Windows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본 사람들이라면 Windows 95 마저도 95a, 95b, 95c가 있었으며, Windows 98과 Windows 98 SE의 차이에 대해 기억할 것이다(한글/영문 Windows도 달랐다). 심지어 95/98을 전후해서 Winsock 1.1에서 Winsock 2.0으로 넘어가기도 했고. 문제는 이미 회사 내에 사람들이 각각 다른 버전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회사 표준 따위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그냥 각자 자기 깔고 싶은 OS를 깔아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심지어 맥을 쓰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요즈음 모바일 개발에서의 파편화 현상과 같은 맥락인데, 그나마 요즘에는 개발 도구라도 좋고 에뮬레이션 테스트라도 가능하지만, 그 당시는 직접 일일이 OS를 다 설치해서 테스트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결국 OS 사용 실태를 조사하고 WinSock 1.1과 2.0을 둘다 지원하기 위한 삽질한 끝에 그럭저럭 1주일 만에 UI(?)를 가진 메신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었다. 네트워크 공유 폴더에 업로드한 프로그램을 회사 전 직원(다행히 많지 않았다)에게 설치해주고 자리로 돌아왔더니, 내 PC에 실행시켜놓은 메신저 프로그램에 L부장으로부터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응, 합격. 내일부터 계속 출근해.


채용 시 전혀 수습기간에 대해 언급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처음 1주일은 묵시적인 수습기간이었나 보다. 하여간 그래서 나는 계속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A사는 당시 닷컴 열풍 속에 막 새로 만들어진 회사 중 하나로, 서초동에 있는 건물 한층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이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입사하기 전에는 정확히 몰랐다. 메신저 프로그램의 성공적인(?) 출시 후, 조금씩 회사의 상황에 대해 파악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입사하기 전은 물론 하고 나서도 이 회사의 사장을 보지 못했다. 사장실이 있긴 했지만, 항상 비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건물 입구를 BMW 7시리즈 한대가 가로막고 있었고, 하얀 와이셔츠에 구닥다리 양복 바지의 밑단을 둥둥 걷어 입고 있는 사람이 담배를 피고 있었다. 99년에 BMW, 그것도 7시리즈는 기사들이 모는 차량이었고, 복장을 볼 때 나는 당연히 그가 운전기사라고 생각해서 "아저씨, 이렇게 차를 대시면 들어가기가 힘들잖아요"라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이 회사의 사장인 K사장이었다.


이 회사의 사장이자 투자자였던 K사장은 원래 본업이 따로 있었다. IMF 시절 1997년 말 즈음 800원 정도 하던 환율이 2000원까지 순식간에 폭등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K사장은 IMF 직전에 10억 정도(정확한 금액은 모름, 대충 이 정도라고 치자)의 계약을 외국 바이어와 맺었고, 대금을 800원 하던 시절에 달러로 받았다. 그리고 그가 대금을 받은 직후부터 환율이 오르기 시작했고, 무슨 영감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는 달러를 환전하지 않고 있다가 피크가 된 2000원에 모두 환전을 하는 기적을 발휘했다. 그 덕택에 갑자기 하루 아침에 20억의 공돈이 그에게 생긴 셈이었다.

K사장은 20억을 원래 본업인 공장에 투자하기 보다는 자기 개인적으로 유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원래부터가 약간 짠돌이인 성격이라 이 돈을 당장 막 쓰기 보다는 불려보기로 했는데, 대체 이 사람에게 얼마나 운이 따랐던 것인지, 돈이 불과 1년 만에 몇배로 더 불어났다고 한다. 그 스스로의 표현으로 '촌놈에게 돈 벼락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그 돈을 폼나게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제일 먼저 한 것은 BMW 7시리즈를 구매한 것이었다. 그런데, 운전기사를 쓰는 것은 돈이 아까워서 자기가 직접 몰고 다니기로 했단다.

BMW를 몰고 골프를 치러 다니던 그는 우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닷컴과 벤처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뭔지는 잘 모르지만, 돈 있으면 벤처 기업 하나 정도는 투자하거나 거느려야 한다는 당시의 풍조에 솔깃해서 자신도 벤처 기업에 뛰어 들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친분이 있던 L부장과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고 L부장이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인원들 몇몇을 빼와서 차린 회사가 바로 A사였던 것이다.


K사장은 단순한 물주일뿐이고, 실질적인 회사의 경영자는 L부장이었다(사실 왜 부사장이나 이사가 아닌 부장이라는 직함을 고수했는지가 궁금하긴 하다). K사장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닷컴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것이 없었고, L부장이 하자는대로 따르면서 자금만 내놓았던 것 같다. 회사 한켠에 있는 서버실에는 당시 최고 사양의 컴팩 서버들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나는 도대체 그 서버들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파일 서버로 쓰는 것이 하나 있었고, 나머지 서버들의 CPU 사용율은 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최 이 회사는 무엇을 하는 걸까?


지금도 여전히 대체 A사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K사장이 회사를 방문할 때마다 전체 회식을 했고, 그 회식이 이틀 걸러 한번씩 있었던 것이다. K사장은 특이하게도 고기집에서 양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고기집에서 팔지도 않는 양주를 꼭 누군가가 사들고 와야 했다. K사장과의 회식이 끝나고 나면, L부장은 나를 2차로 끌고 갔다. L부장은 2차로 무조건 보드카를 마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기가 보드카 병을 모은다고 다 마신 빈 병을 내게 다음날 회사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아니, 그럼 자기가 챙겨야 하는거 아닌가?). 그 덕분에 지하철에 보드카 빈병을 들고 출근해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내가 건넨 보드카 병을 L부장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장식장에 진열하곤 했다.


A사 자체 뿐만 아니라, 심지어 A사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는다. 군생활동안 무뎌진 감각을 되찾고, 이런저런 기술들을 공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게 그나마 유일한 소득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낸 후, 나는 A사를 그만두었다. 당최 무엇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잦은 회식에다 심지어 주말에도 술 마시자고 불러내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술을 좋아할지언정, 고기집에서 양주를 마시고, 2차로 보드카를 마신 후, 다음날 빈병을 들고 가는 생활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퇴사를 할때쯤 내가 가져다 놓은 보드카 병이 스무병쯤 되었다.


이후에도 A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건강보험 자격 기록에는 회사명도 원래 명칭이 아닌 이상한 회사 명으로 변경이 되어 있고, 업종마저도 전혀 다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회사를 내 이력서에 아예 포함시키지 않는다.


A사를 그만 둔 후, 다른 회사를 알아 보는 중간에 나는 선릉역 동우빌딩에 있던 최우인 형의 사무실에 얹혀 지냈다. 사실 사무실이라기 보다는 건물 복도 한켠을 막아 만든 임시 공간과 같은 곳이었다. 친분이 있던 모 병원 원장님이 이 공간을 사무실로 쓰게 해주었고, 병원의 전용선도 같이 쓸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이곳에서 최우인 형/김상협 씨/이동범이 advisor.co.kr(비주얼 스튜디오 사용자 모임-일명 비사모)라는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고 있었고, 사이트를 오픈하는데 같이 참여하게 된다. 이 사이트가 바로 지금은 다른 회사의 소유가 된 데브피아(www.devpia.co.kr)의 전신이다.


당시 비사모 사이트는 IIS 4.0과 FoxPro(아래의 로고를 기억하는 사람?) 기반의 ISAPI 필터 엔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https://en.wikipedia.org/wiki/FoxPro


믿어지지 않지만, FoxPro로 웹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정말 가능했고, 심지어 지금도 이 엔진이 존재한다.

https://webconnection.west-wind.com/docs/index.htm


WebConnection 자체는 무척 속도도 빠르고 안정적인 엔진이었지만, 문제는 IIS 4.0이었다. IIS 4.0은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FTP를 사용해서 파일을 업로드하는 도중에 업로드를 중단해버리면 IIS 자체가 먹통이 된다는 점이었다. 비사모 사이트의 자료실은 FTP를 사용하고 있었고, 누군가가 업로드를 중간에 중단해버릴때마다 사이트가 죽어버리는 상황이 생겼다. 당시에 모니터링이나 알람을 걸어 뒀을리도 만무했고, 4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사이트를 지켜보고 있다가 사이트가 죽으면 IIS를 재시작하는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했다.


비사모 사이트를 만들 당시 우리가 목표로 했던 것은 국내 최대의 개발자 커뮤니티 사이트로 키우는 것이었다. 당시 몇몇 개발자 사이트나 동호회 등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사용자 수나 트래픽이 많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질문/답변 게시판이었다.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별로 VC++, VB, FoxPro, Visual InterDev(ASP)로 포럼을 나누고, 나는 VC++의 초대 시삽이 되었다(지금도 데브피아의 시삽 소개 중 명예의 전당 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내가 그 당시 실력이 뛰어나서 시삽을 맡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아무리 대학 시절 개발을 했다지만, 군대에서 한참을 보내고 사회로 복귀한지 3개월만에 알면 얼마나 알았겠나. 각 포럼에 질문이 올라올 때마다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고,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가며 어떻게든 답변을 최대한 빨리 달았고 "일단 모르면 비사모에 가서 질문을 하면 된다"라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엄청난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점점 사용자 수가 모이면서 오프라인 세미나를 하게 되는 기회도 얻었고 VC++의 첫 세미나를 하게 되는 영광도 얻었다. 당시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세미나실이 80명 규모의 공간이었는데, 200명이 넘는 분들이 와서 바닥과 복도를 가득 메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비사모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과 내가 먹고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비사모 사이트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운영되는거 아닌가라거나, 마이크로소프트에게서 월급 받는 거 아니냐고 의심은 수도 없이 받았다. 정작 서버와 사이트 운영은 4명의 사비를 털어서 나오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대부분의 끼니는 자장면, 컵라면, 바로 옆에 있는 가스 충전소의 기사 식당에서 해결해야했고, 중국집 쿠폰을 모아 탕수육을 먹을때가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물론 사이트를 상업화하거나 투자를 받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당시에는 이 사이트를 커뮤니티로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강했다.

그리하여 각 멤버들은 비사모 활동은 계속해서 하되, 각자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각자 찾게 된다. 나 역시 군 생활(장교로 있었음) 동안 모았던 자금과 A사에서 3개월 동안 받았던 월급은 점점 바닥을 보여가고 있었기에, 결국 면접을 보러 다니게 되었다.


면접을 봤던 회사들 중에 뜨악했던 곳이 있는데, 바로 C사이다. 나중에 한때 국민게임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게임을 만들어낸 회사이다.


면접을 보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가면서부터 살짝 충격적이었다. ‘개발실'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 방에는 책상이 일렬로 주욱 배치되어 있고, 책상 뒤는 통 유리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심지어 PC 화면까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책상폭 자체가 너무나 좁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일을 하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면접을 봤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봤던 면접 중 손에 꼽을만큼 불쾌했던 면접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면접의 전체 뉘앙스는 "야, 너 이거 알아?"와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도 내 성격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당시는 더 치기어린 시기였기에 그런 식으로 덤비는 것을 보면 참지 못했다. 이미 마음 속으로 '여긴 글렀다'라고 생각했기에 "에이,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세요? 그건 이렇게 되고, 이런 거잖아요. 근데, 그러다 보면 이런 문제가 있는건 아세요?"라는 뉘앙스로 계속 받아쳤다.

"(어쭈, 이 XX가) 야, 그럼 너 이거 한번 설명해봐. 니가 이런 건 알겠어?" "난 또 뭐라고. 이럴 때 이렇게 될 수 있는거 말하시는거죠? 그거 이렇게 하면 쉽게 해결되는데?" 뭐, 계속 이런 식으로 1시간을 보낸후 면접을 종료하고 나왔다.

이건 면접이 아니라 서로 말싸움을 하고 나온 기분이라 정말 기분이 별로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여기 C사인데요, 월요일부터 출근가능하시죠?"

설마 방금 그 면접 본 곳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않았다.

"네? 어디시라고요?”

"오늘 면접 보신 C사라고요. 면접 합격하셨는데, 월요일부터 출근 가능하세요?"

 "... 죄송합니다만, 제가 다른 곳으로 생각을 하고 있어서.."

"저희가 희망하셨던 연봉보다 XXX만원 더 드릴게요"

"아니요, 감사합니다만, 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전화를 끝고 나서도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면접을 그렇게 했는데 합격을 시켜줄 수 있지?'

뭐, 면접을 보신 분이 정말 대인배이거나, 오히려 나같이 대드는 사람을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을 소유하셨던 분이실 수도 있겠다. 사실 제시한 연봉이 다른 곳들보다 조금 높았기에, 아주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더더욱 그 때는 자금이 쪼달리던 시절이라... 그래도 그런 상사 밑에서 일할 생각을 하면 끔찍했다.


C사 면접을 본 후, 나는 또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된다.

지인이 다니던 회사였기도 했지만, 이전 면접으로부터의 심적인 타격이 너무 컸던 탓에 상대적으로 이 회사의 장점이 (과도하게) 크게 부각되지 않았나 싶다. 사무실 환경과 분위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고, 개발팀장 및 사장과의 면접도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사실 연봉은 그저그런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회사에 입사를 결심하게 된다. 과연 그것이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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