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Seattle - 1
밴쿠버에서 시애틀에 온지도 이제 몇달이 지났다. 어느덧 우기로 접어 들어 비가 안 오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잠깐 있다가는 여행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앞으로 몇달동안 겨울 내내 겪어야 하는 이 우울한 날씨는 달갑지 않다. 원래부터 이 동네에서 산 이들이라면 모를까, 이러한 Pacific North West의 날씨가 싫어 이 동네로 이사오지 않는 이들도 많다. 그나마 이미 밴쿠버에서 지난 겨울을 겪어봤기에 조금이라도 내성이 생긴 게 다행이랄까.
일단 경험을 해봤다는 건, 다음에 유사한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물론 어떨 때는 경험이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하기도 한다). 캐나다로 오는 과정과 밴쿠버에서 겪었던 해외 생활의 경험 덕에 시애틀에서 정착을 준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물론 캐나다와 미국의 시스템이 좀 달라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새로운 곳으로 가면서 가장 크게 결정해야 할 사항은 어느 동네(Neighborhood)로 거주지를 정할 것인가이다. 회사에서 주는 Relocation Package 중에 Destination Consulting이라는 서비스가 있는데, 한국말로 하면 "정착 서비스" 정도가 되겠다. 주변 동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렌트할 집을 알아보거나, SSN 발급/은행 계좌 개설 등과 같은 것에 도움을 준다. 단, 이 서비스는 3 Business Days, 즉 24시간 치만을 쓸 수 있기에 언제/어디에 이 서비스를 쓸 것인지는 사용하는 사람 맘대로다. 밴쿠버에 왔을 때는 Destination Consultant가 상당한 도움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사용을 하지 않았다. 이미 해외 생활의 경험을 해봤기에 그냥 직접 해결하는게 덜 번거로워서이기도 하고, 이미 시애틀 지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애틀 다운타운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결국 거주지는 시애틀을 기준으로 시애틀 시내나 시애틀의 동서남북에 있는 주변 도시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이 때 남북으로는 I-5 혹은 I-405, 동서로는 I-90 혹은 SR-520이라는 주요 도로 축선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위치, 교통, 학교, 주변 환경 등이 동네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며, 집값 역시 이에 따라 좌우된다. 특히 캐나다와는 달리, 미국은 Public School이 지역별/학교별로 편차가 상당히 심하다. 형편이 되는 이들이야 Private School을 보내겠지만, 대부분은 Public School 중 좋은 곳을 원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건 미국의 경우 동네나 학교에 대한 스코어, 랭킹, 그외 각종 데이터를 볼 수 있는 곳이 많다(예: https://www.niche.com). 때로는 별별 데이터가 다 공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단순히 데이터만을 맹신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자기가 살 동네이니 자기가 직접 동네를 둘러보고 이미 살고 있는 사람과 얘기를 나눠 보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Google Earth로 전세계를 볼 수 있지만, 막상 직접 가서 겪어보는 것과는 또 다른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좋은 동네에서 살고 싶은 것이야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이겠지만, 항상 그렇듯이 돈이 발목을 잡는다. 렌트를 할 것인지 집을 살 것인지, 만약 산다면 지금 바로 살 것인지 아니면 렌트로 어느 정도 살아보면서 상황을 보고 살 것인지가 끊임없이 고민된다. 집값이 계속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거품이 꺼져버릴 것인지도 불안한 요소이다. 거기다 시기에 따라 막상 사려고 해도 매물이 없거나 경쟁이 매우 치열할 수도 있다.
내 경우는 미국으로 건너 온 이유 중 하나가 밴쿠버에서는 집을 구매하는게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 집을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애틀 지역의 집값 역시 최근 몇년 사이에 크게 오르긴 했지만, 거품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를 받는 IT 인력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발생한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금으로 집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모기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를 위해 Credit Union을 방문해서 모기지에 대한 Pre-approval을 신청했다. 기본적으로 받을 수 있는 모기지의 최대 금액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DTI(Debt-to-Income)이다. 나처럼 Credit History가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DTI 비율을 높게 잡아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연봉 10만불을 받는 사람이 DTI가 40%로 산정된다면, 4만불 / 12 = 3333불이 월 모기지 최대 납입 금액이 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월 모기지 납입 금액에는 집값에 대한 원금 상환액 + 이자 + 집에 대한 세금 + HOA Fee까지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DTI를 기준으로 산정된 최대 모기지 금액에 여기다 내가 지불할 수 있는 Downpayment를 더하면 내가 구매할 수 있는 집이 얼마까지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최대한도를 알고 난 후에는 대략적인 집값 시세를 파악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집을 찾아보기 시작할 동네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자녀가 있는 입장에서는 특히 타겟으로 할 학교 후보들을 정하면, 동네 후보 역시 크게 줄어든다. 학교를 결정하고 나면 그 학교의 Attendance Zone 내에 있는 집을 찾아봤다. 대부분의 부동산 관련 사이트(예: Zillow, Redfin 등)에서는 방 개수, 크기, 연식, 가격대 등과 같이 집에 대한 옵션 외에도 특정 학교의 Attendance Zone으로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만약 추후에 이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래 정착할 예정이라면, 자녀의 성장에 맞춰 Elementary/Middle/High School의 Attendance Zone을 모두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얼마나 한 집에 오래 살지 알 수는 없지만, 최대한 옮겨다니는 건 피하고 싶으니.
학교 문제야 한국에서도 똑같이 고려해야 하는 요소긴 하지만, 다인종 국가에 살다 보면 Diversity, 즉 인종/국가의 다양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나라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동네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밴쿠버로 유학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2개가 "한국 사람들 적은 동네가 어딘가요?"와 "한국 사람들 많이 살거나 한인 마트/한국 음식점 많은 곳들 어딘가요?"라는 것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또한 특정 국가나 인종으로 과다하게 편중된 동네에 대해서는 Racism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캐나다는 Diversity가 중요한 요소이며 Racism을 엄격하게 금지하지만(그럼에도 없지는 않다), 미국은 아무래도 상황이 다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I-90를 따라 동쪽, 즉 Eastside에 집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Shuttle이 주로 I-90를 따라 운행되고 있다는 이유도 이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I-90를 기준으로 Eastside는 Seattle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한다면 Mercer Island, Bellevue, Issaquah, Sammamish 정도가 된다. 기본적으로 Seattle에서 가까울수록 집값이 올라가거나 같은 가격에서 집의 크기/연식/상태가 오히려 안 좋아진다고 보면 되겠다. 즉, 가까우면서도 싸고 큰 새 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각 지역을 돌아보고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해본 결과, 최종적으로 Bellevue로 마음을 정했다. 위치 상으로는 Mercer Island가 가장 유리하지만, 가격이 너무 높거나 내 예산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은 너무 오래되거나 크기가 작았다. Issaquah는 너무 주택들이 밀집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답답한 느낌이 들었고, Sammamish는 아무래도 출퇴근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집을 구하기 전 Temporary Housing도 Bellevue에 있는 곳으로 정했다.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쉽고, Temporary Housing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을 학교에 등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밴쿠버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Attendance Zone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밴쿠버에서는 Attendance Zone을 Catchment라고 불렀는데, Catchment 이내에 거주하면 입학할 때 최우선순위가 될 뿐 반드시 Catchment 내에 거주할 필요는 없으며, 입학 이후에는 Catchment 외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원칙적으로 Attendance Zone 내에 거주하는 사람만 해당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입학 이후에도 만약 거주지가 Attendance Zone 밖으로 바뀌면 학교를 옮겨야 하며,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조사한다고 한다. 이 원칙은 Temporary Housing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 Temporary Housing이 위치한 Attendance Zone의 학교에 보내야 한다.
그래서 Temporary Housing도 집을 알아보는 동네 쪽으로 구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회사와 계약된 Relocation 업체가 Bellevue 다운타운에만 Temporary Housing을 제공했다. Attendance Zone인 학교는 Enatai Elementary인데, 문제는 이 지역의 집값이 비싸서 내 예산 범위 내에서는 집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즉, 집을 구하면 얼마다니지도 못하고 학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이미 캐나다에서도 친구들과 이별을 경험하게 한 터라 가급적 이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는 집을 구할 때까지는 학교 보내는 것을 미루는 것도 감안하기로 했다.
Temporary Housing은 2베드룸 아파트였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았지만 이미 캐나다에서 주택에 살면서 마음대로 뛰어노는데 적응되어 버린 아이들에게는 큰 제약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아파트 생활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계속 조용히 해라, 뛰지 마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나마 아파트가 Bellevue Downtown Park 바로 옆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는 나라를 옮기다 보면 이것저것 번거로운 것이 많은데, 가장 큰 난관 중 하나가 바로 Credit History, 즉 신용 평가 내역이 리셋된다는 것이다. 외국 금융 기관 입장에서 나는 그냥 좀 큰 회사에 입사한, 아무런 거래 내역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하다. 투자 이민을 오는 사람들처럼 한방에 큰 금액을 예치할 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앞으로 이렇게 월급을 받을거라는 오퍼 레터 한장이 내 신용을 보장해주는 전부인 셈이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올 때, 비싼(?) 돈 주고 영문 신용 평가 보고서를 발급받아 왔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휴지 조각이었다(참고로 한국에서 내 신용 평가 등급은 1등급). 다행히 대부분의 캐나다 은행들은 신규 이민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계좌 개설 시 프로모션을 받을 수 있고, 일정 한도 내에서는 신용 카드를 발급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물론 기본 한도 이상을 원하면, 한도에 해당하는 Security Deposit을 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동차를 구매하려다 보면 첫번째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대부분의 자동차 딜러가 Credit History가 없는 이들에게는 할부 파이낸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나마 리스를 이용할 수 있긴 하지만, 상당히 비싼 이율을 감당해야 한다. 그 때문에 대부분은 현찰로 차를 구매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년 반 동안 힘들게 쌓았던 캐나다의 Credit History는 미국으로 옮기면서 또다시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Equifax와 같이 미국/캐나다 양쪽을 서비스하는 신용 평가 회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데이터는 공유되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TD를 사용했고, 미국 동부 지역으로 가는 경우라면 TD가 신용 내역을 유지해주지만, 이건 해당 지점이 있는 주(State)에서만 유효하기에 지점이 없는 미국 서부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건 Credit Union(한국말로 하자면 신용협동조합-신협?) 중에 메이저 IT 업체 종사자를 대상으로 신규 이민자 프로그램이 있는 곳이 있어서 은행 계좌 개설을 할 수 있고, SSN을 발급받고 나면 신용 카드 발급, 자동차 론, 모기지까지 진행이 가능하다.
신용 평가 내역을 서두에 꺼낸 이유 중 하나는 돌아다니기 위해 필수적인 모바일 서비스를 신청하는데서 난관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Credit History가 없는 상태에서 메이저 통신사인 AT&T, T-Mobile, Verizon 등에서 모바일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Pre-paid(선불)로 하거나 No-credit check 플랜을 선택하는 수 밖에 없다. No-credit check를 선택하는 경우는 어느 정도의 금액을 deposit으로 예치해야 하는데, T-Mobile이 그나마 가장 작은 deposit을 요구하고, Verizon이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No-credit check 플랜의 경우, Autopay(자동이체) 신청이 되지 않으므로, 매번 직접 결제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T-Mobile은 Prepaid 외에는 T-Mobile One이라는 무제한 요금제만을 제공하는데, BYOD(Bring Your Own Device) 기준으로 2명인 경우 $55, 4명인 경우 $40이다. 속도가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무제한이라는 것과 심지어 세금 포함한 금액이라는 것은 매력적이다. 캐나다에서 사용하던 Telus는 달랑 2.5GB 데이터를 아내와 나눠서 쓰면서도 한달에 세금 별도 CAD $140이었다. 캐나다/멕시코 지역으로 로밍 시 Telus는 1일당 CAD $7의 로밍 요금을 내야 하는데, T-Mobile은 심지어 이게 무료다.
모바일 서비스를 개통한 후, 다음으로 한 것은 Social Security Office를 들러 SSN(Social Security Number)를 발급 받는 것이었다. 신용 내역 조회가 필요한 모든 사항에는 SSN이 필요하므로, 최대한 빨리 신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캐나다의 경우 Service Canada에 가면 그 자리에서 바로 SIN을 발급해주는데 비해, 미국은 신청한 후 최대 2주 후에나 SSN 카드를 받게 된다. 내 경우는 신청 후 5일 정도 후에 배달이 되었다. 카드라고는 하지만 그냥 종이에 인쇄된 것 뿐인데, 대체 이게 왜 며칠이나 걸리는지 모르겠다. SSN 외에도 이처럼 바로 발급이 될 거 같은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한두개가 아니다.
SSN을 받은 후에는 바로 신용카드를 신청했는데, 그래도 예상보다는 빠르게 처리되어 1주일 정도 만에 받은 것 같다. 신용카드 한도를 보고 살짝 놀랬는데, 캐나다에서 Secured로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큰 한도가 Unsecured로 그냥 발급이 되었다(이럴 때 회사 덕을 보는 듯?). 프리미엄 카드는 아니라서 카드 혜택은 그저 그렇지만, 대신 연회비는 없으니 나쁘지 않다. 나중에 좀 더 Credit History가 쌓이면 좀 더 혜택이 좋은 카드로 apply를 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항목은 운전 면허(Driver's License)와 자동차 등록(Vehicle Registration)이다. 자동차를 등록하려면 먼저 운전 면허가 있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 워싱턴 주는 한국 면허증 혹은 캐나다 BC주 면허증이 있으면 워싱턴 주 운전 면허로 교체 받을 수 있다. 한국 면허증을 BC주 면허증으로 교환할 때는 한국 면허증을 수거해갔는데(한국으로 보낸다고 함), 이번에는 BC주 면허증에 펀치로 구멍만 뚫은 다음에 돌려주었다. 면허증은 한국처럼 즉석에서 발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종이로 된 임시 면허증을 먼저 받고 실제 면허증은 우편으로 배송된다.
자동차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운전 면허증과 자동차 보험이 필요하다. 나처럼 캐나다에서 가져온 차량을 등록하는 경우에는 추가로 국경에서 받은 수입 서류와 캐나다의 자동차 등록서류(Title)이 필요하다. 등록비를 내고 나면, 번호판은 바로 받게 되며 Title 서류는 몇주가 지나면 집으로 배송된다(추가 비용을 내고 Quick Title이라는 절차로 빨리 발급받을 수도 있다).
밴쿠버에서 살면서 못마땅했던 사항 중 하나는 BC주에서 자동차 보험이 ICBC 독점 체제라는 것이었다. 경쟁이 없다 보니 보험 가격이 상당히 비싼데다, 견적을 받아보거나 가입하는 것도 항상 브로커를 통해 대면으로만 가능하며, 별그다지 옵션의 선택도 다양하지 않고, 무엇보다 내 보험 가격이 어떻게 산정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내 경우는 예전 보험 경력을 인정받아 할인을 받아 1년에 CAD $3000 정도를 지불했었는데, 주변의 팀 동료 중에는 CAD $4000을 넘게 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비싼 차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혼다 시빅이 말이다).
미국에서 내가 현재 내고 있는 보험료는 USD $2300으로 CAD $3000과 거의 비슷한데, 차이는 밴쿠버에서는 차 1대에 대한 보험료였고, 지금은 그게 차 2대에 대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물론 ICBC 보험료에는 자동차 등록/갱신 비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비해, 워싱턴 주에서는 이 비용을 별도로 내야 하기에 2배의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조금 더 저렴한 정도이다. 하지만, 금액을 많고 작고를 떠나서 온라인을 통해 미리 견적을 받아보고, 보험회사 간 혹은 같은 회사에서도 옵션별로 어떻게 금액이 달라지는지를 내가 비교해보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선택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미국 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경우의 수를 줄이고 하나로 모으는 것을 선호한다. 당장 예를 들어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도 개개인이 다른 메뉴를 주문하면 식당에서 싫어하거나 같이 시키는 사람들도 다른 걸로 시키면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은근히 "통일"하는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식의 경우, 여러 명이 Share해서 먹는 메뉴가 많다 보니 개인의 선택은 상당히 제한될 수 밖에 없고, 다른 선택을 할 경우 눈총을 받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 때 한국의 교육 모토는 "전인교육", 즉 "Generic Person"을 양산하는 것이었다. "남들 하는대로 해라", "튀지 마라"라는 얘기를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고, 그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에 민감해 하고, 유행에 편승하지 않으면 뒤떨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요즘 XXX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니?", "요즘 XXX 없는 집이 어디있니?"라는 얘기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에 비해 서양권, 특히 캐나다보다도 미국은 더더욱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한다. 10여명이 넘는 단체 식사에서 각각이 모두 다른 음식과 다른 술/음료를 주문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누가 무엇을 시켰는지를 다 기억하고 제자리에 가져다주는 서버들을 보면 그들의 능력에 경이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사회의 여러가지 영역에서 지나치게 선택의 영역이 넓어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려울 정도이다. 가령 쓰레기 수거를 예로 들 경우, 한국은 쓰레기 봉투 크기를 빼고는 별다른 옵션이 존재하지 않으며,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서비스는 다른 공공서비스들과 포괄적으로 세금 내에서 제공되는 기본 서비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쓰레기 수거도 개인이 별도로 신청해야 하는 서비스이며, Garbage/Recycle/Yard Waste 별로 컨테이너의 크기가 각각 따로 존재하고 각 서비스를 별도로 신청할 수 있다. 회사의 Medical Benefit을 신청할 때도 캐나다와는 달리 4개의 다른 옵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며, 적용의 대상을 나만/나+배우자/나+아이/나+모든 가족으로 하는 것에 따라서도 금액이 달라진다.
결국 "기본"의 범위 내에 최대한 많은 항목을 포함시켜 놓고 "옵션"으로 약간의 변화만을 허용할 것인지(심지어 이 옵션들마저 패키지로 묶어서만 선택이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 "기본"은 정말 최소한만 가지고 있으며, "옵션"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오게 할 것인지의 차이라고 하겠다. 물론 옵션의 폭이 너무 다양하다 보니, 가지고 있는 돈에 따라 너무 많은 것이 좌우되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이제 미국 공항에서 TSA의 Security Check마저 General Lane과 Fast Lane이 존재하는 걸 보면, 과연 옵션질의 끝은 어디인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 생활과 새로운 팀에서의 일, "집 사기"에 대한 것은 다음에 이어서 적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