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을 결심하다
2001년 4월, 예기치 못하게 회사를 그만둔 후, 막상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다른 회사를 알아봐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A사/B사/K사를 겪으면서 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보다는 그동안 못한 기술 공부나 좀하면서 내실을 다지자는 결심을 했다.
그 때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가 갓 첫번째 베타 버전을 내놓았던 닷넷 프레임워크(.NET Framework)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업무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는 비주얼 베이직이나 FoxPro 등을, 웹 개발을 위해서는 ASP를, 범용적이거나 성능이 요구되는 곳은 C++를 사용하는 식이었고, 프로그래밍 언어와 짝이 되는 개발도구들에 따라 개발자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각각의 언어와 프로그래밍 모델을 익히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개발자는 자신의 주력 개발언어를 선정하여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대부분의 커뮤니티 활동이나 개발자 행사마저도 프로그래밍 언어의 바운더리로 국한되어 이루어졌다.
그런데, 닷넷은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계없이 통합된 프로그래밍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은 범용 개발 플랫폼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1996년에 접했던 자바 1.0이 비슷하긴 했지만, 자바는 자바라는 단일 프로그래밍 언어(지금은 JVM 기반의 다양한 언어로 확대되었지만)로 종속된다는 단점이 있었고, 사실 당시 1.0 버전은 애플릿으로 장난질(?)치는 용도라는 고정 관념이 내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 시기에 국내에서 닷넷을 들여다보고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이제 베타1이 나온 상태이다 보니 한글로 된 자료는 있을 턱이 없었고, 당시 데브피아를 통해 친하게 지내게 된 지인들(이동범, 김현승, 김유철)과 함께 영문 자료를 뒤져가며 맨 땅에 헤딩해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점점 깊이 파들어가면서 어째 앞으로 닷넷이 대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먼저 맨땅에 헤딩을 해본 우리의 경험을 활용하여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함께 하게 되었다.
내가 자주 하는 얘기 중 하나인데,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의 전략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1. 남들보다 먼저 하거나,
2. 남들보다 두루두루 넓게 알거나,
3. 특정 영역을 넘사벽의 레벨로 깊게 파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쉽고 효과적인 것은 바로 1번이다. 새로운 기술에 단지 남들보다 조금 먼저 시간을 투자한 것만으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여기다 책을 쓰거나 번역하고, 강의를 몇번 하게 되면 당분간은 해당 기술의 '전문가' 칭호를 얻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쉽고 효과적인만큼 해당 기술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가면 금방 따라잡는 경쟁자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물량 공세로 경쟁자들을 누르는 방법이 있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또한 해당 기술의 유행이 금방 시들해지거나, 새로운 경쟁 기술이 나와 쉽사리 도태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쉬운 해결책은 역시 1번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계속 새로운 기술을 찾아서 갈아타면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최신 기술이 나올 때마다 이를 족족 소개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길을 택한 이들이라 보면 되겠다.
2번은 '최신'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이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는 방법으로 가장 쉬운 예로 '풀 스택 개발자'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유형은 회사나 관리자가 매우 선호한다. 아무 일이나 던져도 해결해주므로(그래서 '잡부'라고 부른다), 조직의 리스크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맨날 이런저런 잡일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며, 딱히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3번은 매우 어렵다. 일단 어떤 영역을 골라야 할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데, 경쟁이 너무 치열한 영역이면 넘사벽의 레벨까지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며, 경쟁이 너무 없는 영역이면 영역 자체가 사장되거나 도태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대신에 올바른 영역에서 그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는다면 그에 따른 성과와 보상도 매우 크게 돌아온다. 심지어 새로운 영역을 아예 자신이 시작해버릴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먼저 1번 전략을 바탕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해보기로 했다.
2001년 당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기술에 대한 선행 지식을 바탕으로 한 사업 모델은 '교육'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교육의 주 대상은 '개인', 즉 취업을 목적을 한 프로그래밍 과정이나 당시 유행하던 각종 자격증(MCP/SCJD 등)에 국한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 실제 고객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멘토링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지금에야 매우 익숙해진 개념이 된 '소프트웨어 개발 컨설팅'이다.
우리들이 가진 의구심 중 하나는 과연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컨설팅이라는 생소한 사업 모델이 지속이 가능할까는 점이었다. 닷컴 시대로 인해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관심은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분야는 그다지 잘나가는 분야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개발자 채용에도 돈을 아끼는 기업 고객들이 이러한 컨설팅에 지갑을 쉽사리 열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또한 어느 분야나 경쟁이 생기기 마련인데, 어떻게 우리를 다른 이들과 차별화해나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한참동안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국내외 기업 중에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사업 모델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소프트웨어 개발 컨설팅이라는 영역이 거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고, 2000년부터 시작한 최현진 대표님의 인브레인 정도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 인브레인은 아직 정식 버전이 나오지 않은 닷넷보다는 기존의 COM 기반 Windows DNA 아키텍처와 SQL 서버에 대한 컨설팅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닷넷 쪽에 주력하여 차별화를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어차피 시장 자체가 불모지라, 경쟁 상대라기 보다는 파이를 키워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했고.
실제로 우리가 가장 많이 벤치마킹을 했던 곳은 DevelopMentor, Wintellect, ThoughtWorks와 같은 해외 회사들인데, 이들의 공통적인 측면은 '전문가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내세웠다는 점이었다. 컨설팅이라는 비즈니스를 방법론과 프로세스로 이끌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전문가'에서 기반한 신뢰성과 권위는 매매우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여기다 회사 구성원 전원이 이런 전문가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 회사의 아이덴티티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닷넷 기술을 기반으로 소프트웨어 개발 컨설팅을 제공하는 전문가 집단
그것이 "닷넷엑스퍼트"라는 회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