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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woo Ahn Apr 13. 2019

개발자 인생 회고 #3

닷컴 버블의 막차

이제 겨우 2000년에 왔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 Y2K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B사를 퇴사하고 짧은 휴식을 가진다음 새로 설립되는 K사에 합류를 했다.

K사는 모 대기업의 1차 협력업체인 S사의 C사장이 투자하면서 설립되었다. C사장의 입장에서는 벤처기업에 투자함으로써 미래에 더 큰 이익을 도모해서 S사에 다시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투자 과정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까지는 나도 자세히 모른다.

지난 글에서 말했지만, 나는 B사에서 함께 일한 L의 권유로 K사에 합류했다. L은 기술이사를 맡았으며, L의 친형이 K사의 대표를 맡았다. 그외 부사장 한명과 C사장이 파견한(아마도 감시의 목적도 겸하지 않았나 싶다) J부장이 경리/회계를 담당했다. 나는 비록 지분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회사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 했으니 적어도 창립 멤버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K사에서 있던 일은 전적으로 내 기억과 추측에 의거해서 쓴다는 것을 밝혀둔다.


K사(사실 첫 명칭은 K사가 아니었지만)는 양재동의 오피스텔에서 출발을 했다. 새로 창업한 회사가 그렇듯이 처음 며칠은 사무실을 세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시절은 모든 직원들이 사무실 집기를 나르고, 바닥을 기어가며 랜 선까지 일일이 설치하곤 했었다('갈녹파주'가 뭔지를 안다면 당신도 케이블 좀 찍어본 사람?). 그래도 투자를 받아서 시작한 회사기에 맨땅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은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K사가 생각한 사업 모델은 역시 지난 글에서 말한 것처럼 CSP(Content Service Provider)였다. 문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CSP를 구현하는 것보다는, CSP를 가지고 비즈니스 특허를 얻겠다는 일념 하에 특허 신청을 하는데 허비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당시 닷컴 기업들의 분위기가 대략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특허를 선행 취득하여 다른 경쟁자가 비슷한 사업 모델을 추진하려고 할 때 로열티를 얻어내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있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게 가능한 사업 모델이라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특허 신청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특허 신청을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도면을 그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 이 작업을 위해서 Visio를 사용했었는데, Microsoft에 인수되기 전의 Visio를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Visio의 안정성은 쓰레기라고 할만큼 형편없었다. 툭하면 프로그램이 크래시되어 버렸고, 더욱 문제는 크래시되면 작업하던 파일이 손상되어 다시 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몇번이나 공들여 작업했던 것을 날려버렸는지 모른다. 결국 항상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파일을 백업한 다음, 복사본 파일을 가지고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CSP 특허출원 시 대표 도면

회사 전체가 당시에 특허 신청 준비를 하는 것을 빼고는 다른 일을 진행하지 못한 채 몇달이 흘렀다. 특허 전문 법무 법인을 선정하여 실제 신청 절차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제 회사는 특허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예상과 달리, CSP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된 바가 없었다(사실 구현할 생각이 있기는 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그러다가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무심코 제시했는데, 갑자기 그 아이디어를 진행하는 방향으로 급선회를 하게 된다.

예전에 A사에서 할 일이 없어 이런저런 기술을 공부하던 시절에 당시 Microsoft가 NetShow의 후속으로 내놓은 Windows Media Technologies(WMT)를 살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리얼네트웍스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스트리밍 미디어 시장에 Microsoft가 Mpeg4 코덱을 구현하면서 ASF/WMV 파일 포맷과 이를 지원하는 인코더 및 미디어 서버를 내놓았는데, 심지어 이 미디어 서버가 Windows 서버에 번들된 서비스였다. 리얼 서버가 당시 몇억하던 시절에 거의 파격이나 마찬가지인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원본 소스로부터 스트리밍 미디어 파일 인코딩을 만드는 과정을 인코더 SDK를 사용해서 자동화하고, 인터넷 방송채널에 대한 스케쥴링을 제공하며, 컨텐츠 등록 및 퍼블리싱, 컨텐츠 시청에 대한 통계/과금을 지원하는 종합 컨텐츠 관리 솔루션이었다. 예를 들어, 원본 AVI 파일을 선택한 후, 이를 어떻게 인코딩을 할지(해상도, Frame rate), 인코딩이 완료되면 이 파일을 바로 사용 가능한 컨텐츠로 게시할지, 컨텐츠 페이지에 게시할 메타 정보는 어떤 것을 할지를 선택해서 작업 큐에 넣어두면, 자동적으로 이를 처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또한 24시간 방송하는 인터넷 방송 채널이 있다고 할 때, 실시간 방송(A/V 카메라로부터 송출)과 녹화 방송(인코딩된 파일을 송출)으로 방송 편성표를 짜면 자동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CSP 플랫폼이 존재한다고 전제할 때, CP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컨텐츠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것을 쉽게 할 수 있을까에서 구상해본 아이디어 중 하나였는데, 갑자기 이게 회사에서 진행해야 하는 메인 아이템이 되었다.

Windows Media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회사의 개발인원도 몇 명 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이를 개발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밤을 새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오히려 집에 간 날이 가지 못한 날보다 훨씬 적었다. 새벽까지 일하다 책상 옆의 야전 침대에서 쪽잠을 몇 시간 자고, 다시 일어나서 일하는 시간이 무한 반복되었다. 정확히 20일만에 집에 간 날이 있었는데, 그것도 더이상 갈아 입을 옷과 속옷이 없어서 다른 옷을 가지고 빨래를 하러 간 거였고, 몇 시간 잠을 잔 후 다시 옷가지를 싸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하루 세끼는 모두 회사에서 해결해야 했는데, 그나마 먹는 것에 대해서는 회사가 돈을 아끼지 않았었다. 다행히 A사 때처럼 술 마시는 회식은 잦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6개월 정도 한 후, 1차 버전이 그럭저럭 완성되었다. 영업 담당이었던 부사장은 사실상 프로토타입(0.2 정도?)에 가까운 1차 버전을 들고, 여기저기 고객을 만나며 영업을 시도했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영업을 다녀본 경험이 있다. 그 당시는 인터넷 방송의 초창기였기에, 인터넷 방송을 주도하는 업체들은 대부분 성인 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반쯤 벗은 BJ가 실시간 방송을 하고 있는 곳도 가봤고, 한번은 그 BJ랑 같이 생방을 할 뻔도 했다. 여의도에 있던 모 회사는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화들짝 놀랬다. 십여명의 여직원들이 한줄로 늘어선 책상에 앉아서 비디오 테입에 녹화된 포르노를 동영상 파일로 인코딩하고 있는 장면을 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10대 넘는 각자의 모니터에 포르노가 떠 있고, 사방에서 이상 야릇한 소리가 스피커로 쏟아 지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왜 헤드폰을 안 쓰냐고 물었더니, 대표가 사운드가 제대로 나오는지 가끔 지나가면서 확인하기에 스피커로 해놓아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제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당시의 회사들에 이런 솔루션의 구매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직원들은 인코딩 작업의 자동화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자신의 일거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으므로). 어찌되건 다행히 몇몇 회사들과 긍정적인 진행이 되었는데, 문제는 제품의 UI와 사용성이 발목을 잡았다. 개발자가 개발새발 만든 UI가 사실 사용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그래서 고민 끝에 전체 UI를 완전히 갈아 엎기로 결정을 했다. 당시의 모든 코드는 VC++로 작성이 되었는데, MFC나 ATL로 예쁜 UI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당시에 시도했던 것은 C++ 애플리케이션 내에 웹 브라우저를 임베딩시켜서 UI를 HTML로 만드는, 요즘 말로 하면 하이브리드 스타일 앱이었다. 지금에야 하이브리드 앱을 만들기 위한 프레임워크들이 존재하지만, 그 당시는 거의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디자이너가 HTML로 UI를 만들다 보니 UI 자체는 훨씬 예뻐졌지만, 네이티브 영역과 HTML 영역 간의 경계를 넘나 들어야 할 때 골머리를 썩게 되었다. 요즘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네이티브 앱과 하이브리드 앱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고민하는 것을 보면, 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설상가상으로 Microsoft가 Windows Media의 버전을 4.0에서 7.0으로 한방에 점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수많은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고 향상된 것은 맞는데, 문제는 인코더/미디어 서버/DRM을 비롯한 모든 SDK가 전혀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4.0과 7.0 간의 기능/성능 상의 차이가 넘사벽이었기에, 이미 구닥다리가 된 4.0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우리 제품은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즉, UI뿐만 아니라 엔진 쪽 코드마저도 완전히 처음부터 재작성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그나마 한번 만들어본 경험이 있으니, 이를 포팅하는 속도는 그나마 첫 버전을 개발할 때 보다는 빨랐다는게 위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의 명칭은 eCast 2.0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것들은 대부분 상관이 없는 것들일테고, 특허청에서 상표 출원 기록이 그나마 남아 있다. 그때 로고를 발견해서 반가운 마음에 올려본다. 

eCast 상표 로고

그런데, eCast 2.0에는 너무 많은 기능이 들어가 있었다 보니, 이를 사용할만한 고객을 찾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애초에 종합 컨텐츠 관리 시스템을 상정했다보니 이런저런 기능이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고객들은 전체 솔루션보다는 그 중에서 일부 기능만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쉽게 말해 비싼 종합 선물세트보다는 저렴한 단품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인코딩/방송 스케쥴링/컨텐츠 퍼블리싱 자동화 기능에 반응이 시큰둥했는데, 사람(알바)을 고용해서 수작업으로 처리하는게 더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최저 임금과 관련된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인건비로 때우는게 가장 저렴하다는 인식이 짙다. 그러니까, 인력으로 커버 안되는 쪽을 파야 쉽다.


그리하여 또다시 방향을 선회해서 eCast에서 가장 고객이 필요한 기능을 쪼개서 단품으로 만드는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통계 기능이었다. 예를 들어, 특정 영상을 보기 위해 영상 링크를 클릭을 한 것은 알 수 있지만, 사용자들이 영상을 조금 보다 말았는지 아니면 끝까지 시청을 했는지는 추적을 하기 힘들었다. 물론 전용 플레이어를 만들면 가능하지만, 결국 이것은 사용자들이 전용 플레이어를 설치해야만 가능하다(예전 몇몇 사이트에서 ActiveX 형태의 전용 플레이어를 설치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나는가?). 그런데 eCast는 전용 플레이어 없이 순수히 서버 사이드에서 이러한 통계와 이벤트의 추적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능은 실제로 몇몇 회사들에 납품이 되었고, 덕분에 나름 재밌는 통계들을 많이 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기술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 시장과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서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혹은 고객이 당장 니즈가 없더라도 니즈를 창출할 수 있을만큼 혁신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K사를 그만둔 과정을 얘기하기 전에 K사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처음에도 설명했듯이, K사 임원진들은 실제 서비스를 만드는 것보다는 특허 출원/서비스 상표 출원에만 심한 집착을 보였다. 출원 건수가 여러개 되다 보니 특허 출원과 법무 법인에 쓴 비용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처음 C사장이 파견했던 J부장은 불과 몇달 뒤에 결국 회사에서 축출되었다. 감시 역할로 보냈는데, 오히려 그 스스로 공금을 멋대로 유용하는 등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법인 카드에 한도 초과가 뜨는 진기한 경험도 했던 기억이 난다.

대표를 맡았던 L의 친형은 사실상 대표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회사에서 축출되었다. 다만 그 후에도 사외이사의 형태로 계속 월급은 따박따박 받아 갔다. K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는 상당한 빚이 있다고 들었는데, K사를 시작한 후 빚이 모두 청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L의 친형이 대표를 그만 둔 후 새로운 대표가 자리를 채웠다. 당시 K사가 C사장으로 받은 초기 자금은 빠르게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 계산해봐도 당시 회사의 인원 수나 이런저런 상황에 비추어볼 때, 자금의 소진 속도는 지나치게 빨랐던게 아니었나 싶다(대략 위의 사건들을 보면, 왜 그랬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K사는 추가적인 자금이 급했고, 새로운 대표의 인맥을 바탕으로 그를 얼굴 마담으로 세워 정부로부터 정보화 촉진 기금을 받아 낸다. 나중에 밝혀 졌듯이 정보화 촉진 기금은 사방에 줄줄 샌 비리의 온상이었고, 불과 서류 몇장만으로 그 돈을 이렇게 쉽게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추가 자금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사업 아이템인 CSP는 특허 출원 신청 이후 아무런 진행이 없었다. 과연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정확한 시장 조사와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지 않고 진행된 eCast의 개발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한달에 최소 보름 이상을 회사에서 자면서 육체적인 피로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내가 리딩하던 eCast 외에 옆 팀에서 다른 제품이 하나 진행되고 있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직원 PC 사용을 감시하는 시스템이었다. PC에 상주하면서 사용자가 어떤 프로그램을 언제 실행하는지, 기간당 키보드 타이핑 횟수와 마우스 사용 횟수, 어떤 사이트를 방문했는지를 모니터링하는 것을 물론, 특정 프로그램을 지정된 시간에는 실행할 수 없게 하거나, 승인된 프로그램만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심지어 당시 비싼 전용 회선을 (음악/파일 다운로드 등으로) 축내고 있는 직원을 탐지하여 네트워크 트래픽을 제한해버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좋아하는 관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에게는 재앙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심지어 해당 팀의 개발자들마저도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드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는 서비스/제품을 사용자들이 좋아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본다.


흥미롭게도 해당 팀의 개발자들 대부분도 CSP 모델에 흥미를 가지고 회사에 합류한 사람들이었고, 특허에만 매달리면서 아무런 진행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었다. 집단의 의구심에 내 개인의 피로감이 합쳐져가는 상황에서 결국 나는 임원진에게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L이사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럼 나가"

니 까짓게 뭔게 이의를 제기하냐는 식이었다.


충격, 분노, 허탈함이 함께 몰려왔다. 창립 멤버로 함께 해서, 1년을 넘게 회사에서 먹고 자며 온갖 개고생을 해서 만든 결과에 대한 대답이 이것이란 말인가. 뱡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고 해서 단박에 나가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굳이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K사를 다닐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L이사를 만나 퇴사를 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뭐하러 자진 퇴사 의견을 밝혔는지 모르겠다. 겪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해고와 자진 퇴사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인수 인계 등을 위해 2주 정도 뒤에 퇴사를 하기로 서로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서 인수인계를 위한 자료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L이사가 씩씩대며 다시 오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오늘 부로 나가"


황당했다. 그래서 그럼 PC에서 개인 파일들만 백업하고 짐을 정리한 후 나가겠다고 답변을 했다. 그러자 L이사는 갑자기 사무실 전체에 고함을 질렀다.

"야, 전부 PC 끄고 사무실 밖으로 다 나가! 지금 당장!"

영문을 모르는 직원들은 황당해 하면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다. 아니, 이건 뭐지? 내가 무슨 자료를 훔쳐갈까봐 지금 이러는건가?

모든 직원들이 사무실 밖으로 나간 후, L이사는 내가 개인 파일을 백업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나는 백업을 완료한 후 짐을 챙겨서 더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대체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L이사는 내가 더이상 대화를 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꿔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무실을 나와 근처의 석촌호수(K사는 양재동으로부터 이전했었다)로 가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시 IMF 이후 구조조정과 명퇴가 줄을 이었고, 석촌호수 주변에는 정장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신문과 빵으로 하루를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는 중년 가장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들은 차마 가족들에게 자신이 구조조정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을게다. 나는 비록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정확히 말하면 몇일동안 집에 못 들어가 꾀죄죄한 상태) 잠시나마 그들과 같은 입장이 되었고, 몇몇 아줌마들이 혀를 차며 지나갔다. 밤낮을 모르고 회사에서만 보냈던 이에게 밝은 대낮에 햇볕을 받으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게 나는 1년 3개월을 다녔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쫓긴 셈이지만 '자진 퇴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이 일하던 K사의 직원들은 L이사가 갈수록 이상해진다고 얘기를 했다. L이사 뿐만 아니라 회사 전체의 방향이 점점 산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이상한 것 같다'가 아니라 '이상하다'고.

그러던 얼마 뒤, 회사의 서버 구매 계약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H가 내게 상의를 해왔다. 금액 부풀리기 + 허위 납품 후 돈을 빼돌린 듯한 정황이 다수 포착된 것이다. 나는 H에게 더 이상 깊게 파고 들어가지 말라고 충고를 했지만, 그는 조사를 계속하다가 결국 K사에서 해고되었다. 그런데 얼마 뒤 원래 투자자인 C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H가 C사장에게 연락을 했고, C사장은 이런저런 확인차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다. C사장은 창립멤버인 내가 K사를 그만뒀다는(사실상은 잘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H는 C사장에게 자신이 조사한 내역들을 낱낱이 폭로하였고, C사장은 내게 그 중에서 아는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정확하게 아는 내용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고, C사장은 본인이 어차피 투자를 한 것이니 본인이 감수하겠다고 담담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XX억을 날리고도 담담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사업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해당 업체의 대표는 eCast의 소스코드를 넘기는 조건으로 2억을 주겠다고 제의를 해왔다. 그리고 원하면 자기 회사에 개발팀장으로 입사하라고.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 때가 2001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물론 (바보같이) 정중히 거절했다. 2억인데 (미쳤지,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이후 오래가지 않아 K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 누군가에겐 씁쓸한 실패일테고, 누군가에겐 성공적인 Exit plan이었을지도 모르겠다. C사장의 개인 투자금액에 정보화 촉진 기금까지 합하면, 그 금액은 작지 않다.

K사 임원들이 그렇게 집착했던 특허 출원/상표 출원들은 모두 거부 혹은 철회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C사장이 경영하던 S사도 몇년 뒤에 최종 부도 처리가 된 것으로 검색된다.


그것이 닷컴 버블의 몰락이었다. 이 때 줄줄이 새 나간 정보화 촉진 기금을 빌린 회사들 대부분이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지는 것에는 몇년이 더 걸린다. 그 때는 '눈먼 돈'을 못 타 먹은 이들만 바보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어차피 니가 안 먹으면 다른 애가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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