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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 Sep 13. 2024

괴로움도 자긍심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느꼈다. 수업 시간 화장실로 달려가서 울면서 토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때 나는 죄책감의 덩어리였다. 때는 봄이었다. 교실에서는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한 목소리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를 부르고 있었다. 다정하고 따듯한 노래 가사가 나를 할퀴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행복한 말들을 하나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따듯하지 마! 다정하지 마. 괴로우니까. 그렇지만 왜? 그때는 내가 사왔던 병아리가 자라서 어디로 갔는지 알기도 전이었고, 첫 죽음을 경험하기도 전이었는데. 


내 괴로움의 실체는, 없었다(적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괴로웠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엄마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린이는 밝아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괴로워서는 안 되는 것. 내가 괴롭다는 것이,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죄책감은 어른들이 나에게 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에게는 너무 버거운, 존재 자체가 짓눌리는 죄책감은 한동안 내게 머물렀고, 그러다가 이내 멀어졌다. 사실 그것이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고, 이후에도 그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고통의 실체가 있었기 때문에 십대 시절부터는 ‘왜’ 괴로운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열 살 때에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들이 어떤 괴로움과 우울을 안고 있고, 죽고 싶어 하는지 다들 잊어버리거나 모른 척 하니까.


내 안에서 열 살의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안 것은 무척 늦은 시점이었다. 삼십 대에 우울증을 진단받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괴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약의 효과는 신기해서 아무렇지 않은 평정심이 이어질 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는 모종의 배신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나에게 고유한 어떤 감각들이 무뎌지는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두렵거나 아쉽다기보다 ‘이래도 괜찮은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평정심이 유지될 때의 배부른 소리다)


‘우울증’이라는 질병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갖고 있는 특징들이 어쩌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내게 타자의 고통에 대한 보통 이상의 공감능력이나 예민한 감각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건 내 안의 괴로움을 들여다보는 유별난 감각과 떼놓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러면 괴로움도 자긍심이 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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