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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Sep 23. 2024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서평

당시보다 오늘에 더 적합한『계몽의 변증법』의 최고의 안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대표 저작,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 고전 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지은 『계몽의 변증법』의 최고의 안내서”

 책의 뒷표지에 적힌 광고성 문구다. 필자는 이 문구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데, 특히 “『계몽의 변증법』의 최고의 안내서”라는 부분이 그렇다. 물론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해석 텍스트를 모두 읽어볼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가 읽어본 한에서는 그렇다. 이는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가 안내서라는 부분에서, 또 오늘 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쉽게 읽히고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선, 『계몽의 변증법』해석서 중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23년에 출판된, 한국에선 가장 최신의  텍스트다. 이 책은 필로버스라는 단체에서 진행되는 공개 세미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공개 세미나에서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과 함께 『계몽의 변증법』을 강독했다. 책의 저자인 한상원 교수가 직접 서문에서 밝혔듯이 1, 책은 이론적 짜임새는 유지하되 쉽고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쓰여졌고 2,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에게 영향을 준 학자들에 대한 부담감을 독자에게 최소화시켰다. 그 강독회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과 2학년만 해도 큰 차이가 난다. 대게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였겠지만, 그 수준 -특히 『계몽의 변증법』을 읽어본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었을 것이기에- 이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고려해서 쓰여졌다는 게 한 눈에 보였다. 


 『계몽의 변증법』을 왜 읽어야 하는가?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에 대한 서술을 이어가지 전에, 『계몽의 변증법』이 현대에 어떤 시사점과 중요성을 갖는 지를 먼저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의 책이 어떠한 내용을 가지는지, 특히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는지 최소한이나마 언급해야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있다. 인류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라고 단언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계몽이란 인류를 미지에 대한 벗어나게 하는 것, 즉 인류를 야만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련의 과정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저자가 겪었던 시기는 계몽의 최전선이었던 동시에 야만의 최전선이었다. 본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들은 본래 독일의 적을 두고 있었다. 특히 저 둘을 비롯한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도주했고, 오래지 않아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한편,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큰 절망에 빠진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선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통제로 인해 자본주의와 나치즘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직관한다. 


 이는 계몽이 가지는 모순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며, 동시에 책의 제목이 『계몽의 변증법』인 이유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변증법이란 헤겔에 의해 정식화된 변증법을 바탕을 둔다.  이는 동일한 체계 내에 모순이 실존할 수 있으며 이를 극복-또는 화해-하며 시대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다만 -책에서 시대 돌파의 결과물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을 포함하더라도- 아도르노의 그것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헤겔은 역사가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겪으며 결국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보았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경우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통해 현대의 부정적인 징후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인 징후란 당연하게도 계몽 내에 있는 모순이다. 즉 『계몽의 변증법』은 체계의 내재적 비판에 주력한다. 이 모순이 부정적인 징후인 이유는 그 결과에 대한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계몽의 결과물인 자본주의와 파시즘, 더 포괄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폭력과 소외 모두 비도덕적인 현상이다. 여기에 더불어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이성주의자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식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그들은 칸트적 노선에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 노선이란 두 저자가 이성주의자라는 점과 더불어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사회를 옳은 사회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모순이란 이성적으론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둘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계몽이 가지는 모순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령 계몽의 자기파괴성, 문명의 자연화, 인간의 타자화와 소외등등. 이런 문제들 모두 중요한 문제들이다. 또 계몽의 자기모순들은 어느정도 상호연관된다. 상기의 요소들을 알고 있어야하는 이유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결국 계몽이며, 우리 역시 그런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단화된 이성은 언제나 칼이 되어서 돌아온다. 또 저자들이 비판하는 요소들은 현대에 아직 유효하며, 관점에 따라 심화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결론이다. 책의 결론은  “자본주의는 파시즘이다.”라는 명제로 나타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세계대전 이후이며, 저자들이 미국에서의 야만상태를 체현한 경험이 녹아들어있다. 자본주의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계몽주의의 최신이자 최후의 것이며, 그와 동시에 ‘관리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두 상반되어보이는 체계의 본질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그렇게 많이 이해된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시장에 있는 것 뿐이며, 판매되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계산하고 계획한 소산물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많고, 성찰거리는 더더욱 많다. 하지만 이 중 오늘 날의 핵심으로 삼을 만한 테제는 결국 “자본주의는 파시즘이다.”라는 테제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본주의는 계몽 최후의 체계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비교하여 자본주의는 자기보존을 위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특히 오늘 날의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의 차이는 1, 고전자유주의는 경제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라 보통 정치의 영역에서의 자유도 지향했다는 점에서 순전히 경제체계라고만 볼 순 없지만, 신자유주의는 시장에만 집중한다. 2, 신자유주의는 시장에만 집중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시장으로 보려고 한다. 이러한 점은 -특히 서구사회에서 많이 일어난- 효율성과 정부부채를 핑계로 여러 공공분야가 민영화되었다는 점에서 돌출된다. 공공분야가 세금으로 운영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져서는 안되며, 효율성이 곧 옳은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이 곧 옳다.”는 태도를 가지며 모든 것을 시장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려고 한다. 이는 필자만이 관점이 아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저자들은 자본주의와 시장이 모든 걸 집어삼키는 체계임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채택되기도 전에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약 30년 넘게 지속되며 유럽에서는 역으로 민영화된 공공사업을 다시 국영화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현정권의 저의를 알 순 없으며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공공산업을 민영화해야하지 않겠냐는 주제가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다른 국가와는 반대로 한국은 오히려 시장절대주의적 가치관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기묘한 상황이다. 한국 역시 30년 가까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받아들여왔으며, 비슷한 상황의 다른 국가는 신자유주의와 거리른 두고 있는 반면 한국은 오히려 점점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계몽의 변증법』이전시대보다 더 큰 현대성과 시사성을 얻는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관점은 한세기가 지나서 우리나라를 진단하기 무척 적합하다. 


 『계몽의 변증법』의 안내서가 필요한 이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는 -약간 삐딱선은 탔지만- 맑스주의자였다. 그들은 더 이상 혁명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결국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계급문제에 비판의식을 가졌다. 그렇다고 이들이 친프롤레탈리아, 친대중적이진 않았다. 특히 아도르노는 엘리트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이들은 언어가 가진 주술적 힘을 끌어올리고 싶어했다. 이 주술적인 힘이란 포괄적으로 말하면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어에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비판적 사고능력을 활성화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언어분석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명료하고 일목요연한 글쓰기 방식에는 이러한 힘이 부재한다. 이러한 생각 하에 두 저자는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단어를 해석해야하고 다의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흐릿한 -다르게 말하면 풍부한- 단상 위주의 서술방식을 채택한다. 심지어 문체 역시 아주 현학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연유로 인해 『계몽의 변증법』은 너무나도 난해해졌다는 데 있다. 물론 이는  저자들이 의도한 바이긴 하다. 하지만 독자입장에서는 썩 좋은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둘은 아주 다양한 철학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물론 그 철학자들을 아주 깊게 이해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철학자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는 게 썩 쉬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맑스주의자임과 동시에 헤겔의 변증법적 방식을 응용하여 특유의 사유방식을 만들었다. 동시에 칸트적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학문이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라는 니체적 아이디어도 받아들였다. 필자가 읽었을 때 바로 느낀 점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맑스와 헤겔과 칸트와 니체의 후학이라는 점이다. 


 또, 이들은 현실과 분리된 지식인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동시에 현실과 연관된 학문을 전개해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상기의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현실과 유리된 철학이 나타나게 된다. 이들과 동시대에 철학했던 전통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카치는 이들을 그랜드호텔에서 철학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실제로 유럽에서 전쟁을 직면하고 이후 공산주의 혁명에 참여하거나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그 동안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그랜드 호텔’로 비유되는 미국 -혹은 종전 후 독일- 에 투숙하며 경제적인 여유와 안정을 누리며, 창 밖의 현실을 내려다보며 우울한 사색을 진행한다. 루카치의 말에는 뼈가 있음이 확실하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만인이 엘리트가 되는 것이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혁명의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하였듯 그럴 가능성은 없다. 


 『계몽의 변증법』은 분명 현실과 유리된, 엘리트주의적 텍스트다. -아도르노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뜬구름소리 잡는 지식인인 신좌파의 탄생의 토양이 되었다. 그리고 신좌파가 가진 문제는 아도르노 본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반지성주의, 반엘리트주의라는 새로운 야만상태로 현현하며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모순적이게도,『계몽의 변증법』은 동시에 현실과 밀착한 텍스트다. 전술했듯 “자본주의는 파시즘이다.”라는 테제가 그러하다. 이 만큼 현실과 대중에게 밀착된 주제는 없다. 노동자,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소비자는 결국 스스로가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사실을 통렬히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전공자들에게도 모호하고 그들 사이에서도 쉽사리 해석의 일치가 아닌, 불화를 가지고 온다. 전공자들에게도 이러니 비전공자에게는 책의 큰 줄기를 따라잡기도 어렵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은 책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 및 구체화한다. 놓치기 쉬운 다른 철학자에 대한 연계도 설명한다. 또 이러한 주제들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날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일들을 예로 든다. 이 예들은 맥락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숙고와 성찰을 유도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그렇다고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가 정말 안내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전공교수가 쓴 것이고 꽤 깊이가 있다.  한상원 교수의 여러 지식과 연구결과들 역시 혼합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식견이 있을 지라도 『계몽의 변증법』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도 썩 도움되는 일이 될 것같다. 위의 책은 아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한상원 교수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과 다른 사람이 읽고 정리한 생각이 다를 가능성도 꽤 높다. 이러한 시점을 만나는 것부터 지적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얘기해보면, 『계몽의 변증법』과 홉스를 연결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해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보통의 계몽주의자들이 원했던 것은 홉스의 세계관의 그것과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홉스의 폭력적인 세계관이 나타났다고 적는다. 실제로 한상원 교수는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계몽의 변증법』을 엮어서 분석한 논문을 이미 발표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결국 ‘지적인 견제와 끊임없는 비판’ 뿐이라는 상념에 빠져있었다.두 철학자가 조금이라도 희망했던 것은 자신들을 읽은 한 명이라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사고능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념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부합했고, 오늘 날에도 그러하다. 하지만 만일, 그들의 관점과 결론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시대정신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더 나은 미래와 사회가 몇 초라도 더 빨리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기대를 가지며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에 대한 서평을 썼고, 또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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