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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Oct 12. 2024

『조커』『조커:폴리 아 되』해석

조커는 21세기의 조르바인가?

  이 글은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조커라는 인물이 자유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조커』와 그의 후속작인 『조커: 폴리 아 되』( 이하『폴리 아 되』) 를 포괄하여 답을 내리고자 하는 시도이다. 자유인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하나의 인물을 염두에 둘 수 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에 의해 탄생한 조르바라는 인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세상에 공개 된 이후, 조르바라는 인물은 자유인의 범형이 되었다.


 춤의 의미


 조르바와 조커에게 있어서 춤은 -당연하게도 『조커』시리즈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스스로를 일자무식으로 칭하는 조르바는 춤을 즐긴다. 하지만 아무런 상황에서나 추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벅차오를 때 춤을 춘다. 학력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결코 많다고 볼 수 없는 조르바는 그것을 일반적인 의사소통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조르바는 춤을 춘다. 조르바에게 춤은 언어를 통해 체계적으로 나타날 수 없는, 세상에 육체로서 실존하는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다. 춤은 육화된 자유이다. 쉽게 말해, 춤은 자기 표현이다.


 ‘춤=자기 표현’이라는 명제는 『조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서 플랙의 춤은 하나의 장면에서만 등장하진 않는다. 자신을 린치한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 그는 물때가 낀 화장실에서 춤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발산한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적절한 표현인진 모르겠으나- 각성하는 것은 춤을 추며 이루어진다. 이 장면에 조커의 춤은 계단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진행된다. 어찌보면 막춤같이도 보이지만, 그만큼 자유로워도 보인다. 조커의 표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게 몰입하여 있는지, 또 흡족해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머레이쇼에 등장하기 직전까지 커튼 뒤에서 춤을 춘다. 조르바와 조커는 분명 같은 이유로 동일한 행동을 한다.


 조커와 조르바의 방향차이

 조커와 조르바의 춤은 동일한 맥락 하에서 같은 목적을 지니지만 지향하는 방향은 정반대다.. 조커가 어느 방향을 향하는 지는 명백히 드러난다. 전술했듯 진정한 조커가 나타나는 과정은 계단을 아래를 향해 내려가며 진행된다. 즉 그는 아래를 향하는 인물로, 이것은 물리적으로도 표현된다. 반면 조르바의 춤이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는 물리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르바와 조커의 행실차이는 둘의 방향성이 다름을 명백히 보여준다.


 인류학적, 또는 신경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느 문화권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지방식이 존재한다. ‘위, 상승, 빛, 좋음, 도덕’ 따위의 개념은 보통 하나로 묶인다. 동시에  ‘눅눅함, 어둠, 아래, 하강, 비도덕, 불쾌.’함 따위는 하나의 범주로 묶인다. 물론 극소수의 지적체계-도교나 니체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는 이러한 상황을 비꼬는는 경우가 있다. 니체나 도교는 하강을 도덕과 연결시키며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극소수이다. 또 그들의 사고방식 역시 상승을 좋음으로, 하강을 나쁨으로 보는 문화인지적 토대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는 경험을 앞서는 인지가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르바는 본래 스스로의 살인을 합당하게 여겼고, 더 나아가 그것에서 충족감도 느꼈다. 조르바는 그리스의 게릴라로써 터키군에 대항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살인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님을 체감하게 된다. 조르바가 한 터키 고관을 살해하고 코를 잘라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자식들이 거덜뱅이가 되어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걸 보게 되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낀다. 또 좌절하고 낙담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아이들에게 던져준다. -그가 하는 일이 기행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인간이라면 응당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인간으로 면모해나간다. 반면 물리적으로도 하강했던 조커는 이후 살인자이자 진정한 조커로 변모한다. 조르바의 행동이 위를 향하는 것이라면, 조커는 그 반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서 플랙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은 상당히 집요하다. 보통의 관점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모살해는, 아서 플랙의 뒤에 환한 빛을 보여줌으로써 연출적 합리화가 진행된다. 좋음으로 여겨지는 빛을 살인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물론 이 장면은 아서 플랙의 비극적 서사와도 맞불리긴 하지만 말이다.


『조커: 폴리 아 되』로의 진전 - 맨얼굴과 가면의 두 가지 의미


 맨얼굴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맨얼굴은 거부할 수 없는 인과적인 족쇄다. 하지만 동시에, 맨얼굴은 그 사람 자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맨얼굴은 서로를 구분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기능을 가진 요소 중 맨얼굴보다 직관적인 것은 없다. 이와 동시에 맨얼굴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페르소나나 화장 따위의 이전에 존재하는 개체의 본래적 특징이다. 개체의 본래적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은 자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맨얼굴은 자유가 배재된 인과성의 소산이지만, 동시에 개체의 본래적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이다.


 이러한 모순적 특성은 가면 -조커에서는 광대 분장으로 드러난다-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가면은 후험적으로 부여된다. 즉 가면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맨얼굴에서의 인과성을 벗어난다. 이런 점에서 가면은 자유의 상징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후험적이라는 속성은 억압과도 연결된다. 가면은 타인과 사회에 의해서 쓰여질 수도 있다. 이것은 개체가 가진 본래적 특징이 억압됨을 의미할 때도 있다.  심지어 스스로가 썼다고 생각할 때도, 사실 그 손은 타인의 손에 붙들려있을 수도 있다. 가면, 분장 역시 사회적 인과성의 소산이다. 동시에 자연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개체의 자유로운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되기도 한다.


  맨얼굴과 가면은 이렇게 모순성마저 똑 닮았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맨얼굴과 분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서 플랙은 본래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으며, 이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 해피와 연결된다. 반복적으로 폭소라는 발작이 일어나는 그를 어머니는 해피라고 부른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 또 다른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라는 의미에서 부여되었다. 아서 플랙에게 해피라는 이름은 시나이산의 석판 처럼 다가온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웃음을 주기 위해 코미디언이 되었다. 문제는 그가 전혀 웃기는데 재능이 없다는 점에 있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웃기게 생겼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의 맨얼굴은 웃기지 않음, 이라는 자연적 인과성의 한계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 플랙은 얼굴에 분장을 한다. 즉, 그에게 분장이란 자아 실현을 위해 후험적으로 부여된다.


 『조커』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영화이다. 미시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아서 플랙이 자유롭냐 아니냐의 문제 역시 그렇다. 『조커』의 경우 후속작과 비교하면 조커는 자유의 실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삶을 해부해보면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다. 특히 『폴리 아 되』에서는 그러한 해석은 철저히 전복된다. 아서 플랙이 조커가 된 것은 결코 사회적인 관계망에서 떼놓을 수 없다. 또 조커라는 존재 역시 철저히 사회적인 관계망에 존속된 존재임이 드러난다.


  조커의 광대분장은 스스로 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기로 하다. 나에겐 분칠을 하는 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손들이 보인다. 억센 손들이다. 심지어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가 광대 분장을 해준다. 그녀는 그와 몸을 섞고자 할 때 화장품을 가져와 분장을 해준다. 또 감옥에서 면회를 할 때, 통유리 위에 붉은 입술을 그려준다. 카메라는 붉은 입술과 아서 플랙의 얼굴이 겹치도록 움직인다. 수감생활 동안 조커와는 멀어졌던 아서 플랙은 할리와 조커를 원하는 대중들-심지어 같은 수감자들 중에도-들에 의해 다시 분장을 한다. 그의 분장은 피상적으로는 자원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이 그를 분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아서 플랙은 결국 조커를 버렸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조커를 연기할 감정적 에너지를 잃었다. 또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 의한 것임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서 플랙은 자신들과 함께 가자는 추총자들의 손 역시 뿌리친다.


 뮤지컬, 그의 꿈이자 망상


『폴리 아 되』 가 뮤지컬 영화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뮤지컬의 잣대로 영화의 노래들을 보면 넘버로써의 완성도는 너무나도 뒤떨어지며 흡입력도 없다. 감독이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최소한 필자는 『폴리 아 되』 가 뮤지컬 장르의 특징을 일부 차용했을 뿐이라고 여긴다.


 전술하였듯, 춤은 표현의 수단으로 쓰인다. 『폴리 아 되』에서는 그러한 표현의 수단이 확장되는데 바로 노래다. 춤과 노래의 결합, 즉 뮤지컬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또 자기 표현이란 필연적으로 개인의 감정과 욕구를 기반에 둘 수 밖에 없다.


 다만, 아서 플랙이 『폴리 아 되』에서 언제 노래와 춤을 추는지 생각해보자. -할리와 교도소에서 도망치는 장면에 망상이 섞여있는지 아닌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가 뮤지컬을 하는 순간은 할리와 함께 있을 때, 혹은 자신의 망상 안일 뿐이다. 즉 아서 플랙의 자기 표현은 억압된다. 표현이란 본래 안에서 밖으로 향해야하는 것이지만, 그의 경우엔 억압에 의해 반대로 표출된다. 그는 자기 표현 조차도 외부로 하지 못하고, 철저히 자신의 망상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소외된 존재다. 재판장에서의 조커는, 자기 표현의 내재화에 죄절감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마치『조커』를 보고 절절한 공감을 느낀 사람들 처럼 말이다.

 폴리 아 되, 한국어로 공유정신병적장애라는 부제는 이러한 상황을 빗댄 것이다. 공유 정신병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신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경우를 일컫기 때문이다. 조커가 할리퀸에서, 또 할리퀸이 조커에게 서로 영향을 주었음은 명백하다. 또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가 아서 플랙에게, 또 조커가 사회에 정신병적 영향을 주었음은 영화를 본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결론 


 아서 플랙은 조커를 버렸다. 이 조커라는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부여된 것임을 전제한다면, 그는 자유를 향해 전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서 플랙이라는 존재 역시 타인의 시선에 의한 것임을 상기해야한다. 그의 변호사와 게리는 그가 조커와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길 원하며, 또 그렇다고 주장한다. 조커를 버린 아서 플랙은 무기력하다. 또 다른 대중들이 바로 그런 아서 플랙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조커도 아서 플랙도 조르바가 아니다. 둘은 사회에 존재하는 공유 정신병의 주체이자 객체일 뿐이다. 조커가 사회의 어두컴컴한 곳에 도사리는 감정들의 대표자라면, 아서 플렉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순종적인 인간상의 표상이다. 확실한 건 사회란 이 두 면모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양자란 하나의 육체에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조커-아서플렉이란 인물은 사회를 통해 분열되는 인간상에 대한 표현다. 애시당초 사회란 것은 그 자체로 광기고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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