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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현 Nov 02. 2024

coma

엽편

 1.

 방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어머니를 거들었다. 어머니는 가스레인지로 된장을 끓이고 있었고, 다른 화구에선 양념에 재워진 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널브러진 그의 모습은 마치 돈을 벌어온 자신의 노고를 과시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여동생은 수험생이라는 변명거리가 있다.


 식사 준비가 끝나면 나는 다른 두 사람을 부른다. 두세 번은 큰 소리를 내야 아버지와 여동생은 방 밖으로 나온다. 아버지는 이어폰을 낀 채로 밥을 먹는다. 동생은 유선이어폰을 낀 채 넷플릭스를 본다. 어머니는 스피커로 유튜브 쇼츠를 본다. 근래에 항상 피곤해 보이시는데, 새벽까지 쇼츠를 보다가 주무셔서 그런 듯하다. 가족 식사 중에 핸드폰 없이 밥을 먹는 건 나뿐이다. 나는 기계를 다루는데 서툴 뿐더러, 디지털에 별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아버지가 음식의 맛에 대해 얘기한다. 눈은 핸드폰을 보고 있다. 어머니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표정이다. 그녀는 여전히 쇼츠를 보고 있다. 내가 몇 마디 말을 해봤자 가끔 건성으로 응, 응하는 추임새만이 맴돈다. 난 알고 있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식사 자리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호르몬과 호르몬 수용체보다는 연한 것이라고.   


 가끔 길을 지나다 보면, 또 카페나 식당에 앉아 있다 보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식당이나 가게에 입장하면서 직원을 부르는 때에도 양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나는 가장 먼저 밥을 해치운다. 사용한 식기들을 개수대에 넣고 베란다로 나간다. 분명 30분 남아있었던 세탁 시간은 여전히 30분 남아있다. 곧 세탁기도 바꿔야겠구나, 생각하며 턱에 걸터앉는다. 나는 세탁기에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위로 뚜껑을 여닫는 세탁기는 너무 낡았다. 나는 네 명분의 빨래를 혼자 넌 후에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다른 가족들도 모두 빛을 싫어하는 벌레처럼 자신의 방으로 재빠르게 숨어들은 후였다. 책장에서 책을 몇 권 꺼내본다. 생명 연습을 폈다가 이내 접는다.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을 잠깐 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대신 나는 CD를 꺼냈다. 책장에는 서태지의 음반들이 꽂혀있다. 밴드의 반주와 서태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걸 들으며 작게 흥얼거린다.


 “높게 올려 쌓은 담 이 단절 속에 넌 나의 꿈에 거짓을 고한 이후~”


  2.

 나는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었다. 누군가는 앉아서 졸고 있다. 누군가는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다. 예전에는 지하철에서 센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승옥을 읽는 사람이 있었고, 김수영을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는 정재승이나 유시민의 책, 또 김영하의 책을 보는 사람들 조차도 자취를 감췄다.


 나는 인파에 떠밀리듯 하며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하는 사람들도, 이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역을 놓치지 않는다. 역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대중교통이 낯선 어중이떠중이들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책을 읽다 보면 내려야할 곳을 자주 지나쳐버리곤 했다. 나는 차창 너머로 한강을 보았고, 그 옆의 여의도와 국회의사당을 보았다.


 내 마음은 강바닥의 쓰레기들처럼 가라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길이 휘몰아쳤다. 만약 내 마음이 쓰레기가 아니라 물이라면, 그건 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물보라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거센 파도라고 묘사해야 할지 난 모른다.


 나는 갑자기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전하고 싶었다. 그저 한 마디면 된다. 역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최소 15분은 걸린다. 어떤 날은 25분도 걸린다. 나는 길을 가다 사람들을 붙잡아보았다. 저기요, 이어폰을 낀 사람은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그냥 지나쳐버렸다. 미세한 반응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며 걸었다. 내가 말을 걸자, 손사래를 치며 계속 고개를 처박은 채 길을 지났다. 그렇게 몇 명의 사람들이 날 지나쳐갔다. 이번엔 손에 서류 가방만을 든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팔과 다리에 근육이 붙은 것처럼 보였지만, 유난히 뱃살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저……, 저기요.”

 그는 날 보자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저, 여기 있어요. 네? 저는 지금 여기 있다고요.”

 그 남자는 거칠게 팔을 빼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떠났다. 나는 학교로 마저 향했다. 걷는 중에 날 배 나온 남자의 표정이 계속 떠올랐다. 그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불운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핸드폰을 보고 노래를 들을 시간에 사람들의 표정과 미묘한 손짓들을 본다. 그리고 때마다 어조를 느낀다. 그에게 나는 차도에서부터 튄 물세례, 어떤 문제 때문에 지연되는 대중교통 따위와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아마 출근 중이었을 것이다. 사회인들에게 직장만큼 중요한 건 없다. 아마 나였어도 그랬겠지.


 평소보다 출근이 몇십 분 늦었다. 별문제는 아니다. 조교 생활은 저번 학기에 끝났고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배제되었다. 내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아무런 차이도 느끼지 못 할 게 분명하다.


 “저 잠시 403호 좀 써도 될까요?”

 거긴 학생들이 졸업논문이 급할 때야 가끔 쓰는 실험실이다. 나는 열쇠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의 기재들은 멀쩡했고, 쓰다남은 재료들도 충분했다. 나는 화약을 만들었다. 공부만 열심히 했다면 학부생도 만들 수 있다. 나는 봉투 속에 화약을 밀봉한 후 가방에 숨겼다.


 3.

 저녁, 나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혼자 설 자리도 확보하기 힘들 정도로 혼잡한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핸드폰을 꺼낸다. 나는 그저 휩싸여있었다. 지하철이 가끔 급정거를 하면 균형을 잃고, 인파들의 등쌀에 여기로 밀리고 저기로 떠밀린다.


 시청역에서 내렸다. 일민미술관이 보일 때즈음 부터 귀가 터질 것 같다. 자칭 기독교인들은 큼지막한 스피커를 가져와 촌스러운 찬송가를 불러댄다. 그러고 보니 서울시의회 앞에서 시위 한창이었다. 기독교인들의 맞은편에는 중국어 팜플렛을 나눠주는 신비주의자들과 휠체어에 깃발을 꽂고 다니는 정치병자가 있다. 그들은 단지 횡단보도 하나만을 거리에 두고 있다. 나는 특정 정당의 신봉자들을 지켜본다. 거의 다 늙은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은 인생이 적적해서 무엇에라도 열정을 품어야 했으리라고 나는 어림짐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약자들이나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을 믿듯 정치인들을 믿는 사람들은 뭘까? 그렇게 말한 사람 역시 한 정당을 믿었고 헌신했다. 퇴근 중인 직장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지났다. 그들에겐 이런 환경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광화문 광장으로 간다. 그리고 기폭버튼을 눌렀다. 나는 여기 있다. 큰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귀가 멎는다. 폭발과 함께 날아가는 내 손가락이 보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의 생명도 연기와 함께 위로 올랐다가 곧 산산이 흩어지리라.


 내가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화상을 입으면 형사들은 내 방을 샅샅이 뒤질 것이다. 그러면 내가 펜을 꾹꾹 눌러 담은 메모를 발견할 것이다.


 언어를 가졌지만, 서로 소통할 수 없다는 부조리.

 이성을 가졌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부조리.

 감정을 가졌지만, 서로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부조리.

 그럼에도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부조리.


 사람들은 결론 내릴 것이다. 이 사건은 한 정신병자의 비관에 의해 벌어진 잔학무도한 테러였다고. 미디어와 사람들은 날 악마라고 부를 것이다. 상관없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여기 있었다. 그걸 전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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