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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 Nov 12. 2022

1살, 색채가 없는 아이, 둘째

덕선이가 늘 난 괜찮아 양보하는 이유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삼남매의 둘째, 덕선이의 모습


1994년, 그 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고 한다. 10년만의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되던 그 맘때즈음, 모두가 남자아이를 원하던 그 집에 두번째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요즘이야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없어졌고, ‘결국 커서 효도하는 것은 여자아이’라는 생각이 으른들 사이에서 많이 퍼지고 있다는데 30년 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못낳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엄마도 그런 구박을 받고있던 서러운 며느리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빠의 다섯 형제 중에서, 아들을 못 낳은 것은 우리집 뿐이었으니, 당시 엄마가 느꼈을 부담감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아빠는 또 어떠한가. 친척들이 다같이 한 자리에 모이는 명절 날이면, 짖굳은 큰아빠는 아빠에게 ‘경운기’라는 별명을 지어주어 만날 때마다 ‘딸딸딸딸…’하며 한바탕 웃어제끼기 바빴다고 하니, 농담이었다고는 해도 아빠의 자존심 역시 많이 상했으리라.


그런데 그런 집에 또 다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나중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엄마는 나를 낳고 병원에서 울었다고 한다. 언니나 동생 때와는 다르게 아빠는 오히려 그런 엄마를 위로하려고 매일같이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 후, 엄마와 아빠는 결국 막내 동생을 남자아이로 낳는데 성공하셨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이 평범한 둘째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딱히 막장 드라마에 나올법하게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자란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늘 우리 삼남매를 공평하게 대하려고 노력했고, 적어도 첫째에게 해준 것은 둘째에게도, 셋째에게도 해주려고 하셨다. 셋이 다툴 때면, 늘 다같이 혼이 났고, 칭찬을 받아도 다같이 받았었다. 그렇게 두 분은 평생 삼남매를 잘 키워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부모님의 은혜에 늘 감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크면서 은연중에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딱히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눈치준 적은 없지만, 그냥 스스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들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둘째이기 때문에 뭐하나 딱히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니는 첫째이기 때문에 늘 먼저였다. 첫번째 자식이기에 예쁜 옷을 입었고 좋은 것을 먹었다. 교육에도 더 신경썼다. 그 시절, 동네에 몇 없었던 사립유치원에 가고 우리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멋진 교복을 입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친척들 사이에서는 첫번째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예쁨을 받았었다.


동생은 그토록 바라던 남자아이였다. 우리집의 첫번째 아들이었고, 아빠에게 ‘경운기’ 별명을 지워준 존재였다. 동생과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고 거의 같이 자라왔기 때문에, 크게 차별받았던 기억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의 소풍날이면, 나는 늘 시장에서 김밥 한줄을 사서 포장해갔었던 것에 반해, 동생의 소풍날에는 엄마가 정성스럽게 김밥을 만들어줬던 기억이 있다. 원래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그날은 괜히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서 그런가’하고 혼자서 울컥했던 기억이 있다.


자라면서 언니와 동생에 비해 내가 딱히 뭔가를 내세울 수 있는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 스스로가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언니와 동생만큼 엄마아빠에게 큰 관심을 받아야할 번듯한 이유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둘째로 살아남기

그런 둘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했을까. 다양한 전략들이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삼남매 중 가장 ‘착한 아이’가 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인지, 타고난 성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부터 아빠는 늘 나를 두고 ‘공짜’라고 불렀다. 잔병치레도 많고 장난끼도 많았던 언니에 비해 나는 우유병만 물려주면 울지도 않고 조용히 있고, 장난감도 하나만 던져주면 혼자서 몇 시간이고 울지 않고 잘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언니에 비하면 공짜로 나를 키웠다는 의미인 것 같다)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가 뭘 알아서 그랬겠냐만은 그렇게 나는 어린시절 얌전히 있으면 부모님께 예쁨받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때까지는 성격도 굉장히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키워진 것 같다. 언니가 엄마와 싸우고 있다면, 기분이 안좋아진 엄마가 나에게도 괜히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엄마와 언니가 싸울 때면, 나는 장난감을 치우고 집안 곳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괜한 불똥을 맞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환경 때문인걸까. 나는 학교에 가서나 사회에 나가서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남들보다 빨리 눈치챌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경우, 기분이 안좋아보이는 사람에게 괜히 말을 먼저 걸어서 분위기를 풀어본다던가, 한번도 말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그 사람도 같이 대화에 낄 수 있도록 한다던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오지랖을 많이 부렸었다. 가끔은 그런 상황이 너무 잘 느껴져서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느라 오히려 나는 대화에 잘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들께 이쁨을 받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가 말을 하기 편해하는지와 같은 것도 그냥 어린시절부터 길러온 둘째의 눈치파워 덕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거나 다 좋아, 상관없어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나고 자란 삼남매의 둘째는 자신만의 주관과 취향을 형성하기에 어려운 환경을 갖는다. 나이로 따져보면, 둘째는 첫째나 셋째 그 누구와도 방을 같이 쓸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방을 갖을 수 있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창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취향을 발견해나갈 시기에 혼자만의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실제로 내가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은 언니가 외국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고, 아마 고등학교 때 쯤이었을 것이다. (그전까지 아주 어린 시절에는 나이차이가 적다는 이유로 남동생과 방을 같이 썼었고 어느정도 머리가 큰 이후에는 언니와 방을 함께 썼었다)


게다가 첫째와 성별이 같기라도 한 경우 둘째는 이미 첫째가 입었던 옷들을 그대로 물려입는 경우가 많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린시절 내가 입었던 옷들은 전부 언니가 입었던 옷이었고, 어쩌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좋아하는 색을 알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내 취향을 그것에 맞춰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거나 좋아, 나는 상관없어


둘째로 자란 내가 평생을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다. 옛날에는 진짜로 아무거나 좋았고 어떤 것을 하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정말이지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잘 먹었었고, 어떤 것이든 재미있게 다 잘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그랬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가 털털하고 쿨하며 예민하지 않고 둥글둥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게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 큰 성인이 되고 나서 문득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보았을 때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내 의견을 굽히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해버려서, 아무거나 상관없었던 아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물려입은 언니 옷이 입기 싫었을 때, 그냥 내가 취향을 바꿔버리면 엄마가 덜 피곤해지니까,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동생에게 양보하면 시끄럽지 않고 모두가 편해지니까, 초밥이 너무 먹고 싶어도 해산물을 못먹는 친구를 베려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그냥 내 의견을 크게 주장하지 않고 아무거나 상관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둘째는 지금

30살을 앞두고 있는 요즘, 나는 전과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냥, 아무거나, 상관없는 사람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이 훨씬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늦게나마 조금씩 나의 취향을 찾아가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자취를 하게 되면서, 마침내 조용히 혼자서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그냥 아무거나 대충말고, 내가 좋아하는 오랜지 색의 스웨터를 입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내가 좋아하는 이자카야에서 오코노미야키와 따뜻한 사케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나는 나만의 색을 찾아보려고 부단히 노력중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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