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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ul 31. 2024

한 장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우리는 '진짜' 기억하는 법을 잃어버렸는지도


오늘 하루 종일 스마트폰이 버벅거리며 속도가 느려졌다.

2020년 1월에 샀으니, 벌써 5년 차.

요즘 기준으로는 아주 오래된 스마트폰이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통화하고 카톡 보내고 쿠팡으로 생필품 주문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아주 최신 기능을 갖춘 신제품이 필요치 않다.

(가끔 신제품이 론칭되면서 온갖 광고 매체로 떠들썩 할 때는 눈길이 가기는 한다.)


수시로 이메일도 확인해야 하고 카톡도 보내야 하고 전화도 받아야 하는데

5년 밖에 안된 녀석이 오늘 하루 종일 버벅거리니 짜증이 슬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제 제주도로 캠프를 떠난 아들의 멘토 선생님 전화도 받아야 하는데

버벅거리는 전화기가 터치마저 안되니 전화 수신을 할 수도 없었다.


부랴부랴 사용하지 않는 앱을 지우고, 메모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그러다가 사진과 동영상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많은 사진과 영상이 핸드폰 속에 있었다니...

필요할 때 참고하려고 캡처해 둔 사진부터,

아이의 일상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

하루 격언/명언이 담긴 사진들과

이것저것 잡다하게 다운로드한 사진과 이미지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게다가 나를 더 놀라게 한 건,

가족 여행하며 찍었던 사진들이 여행지별로 수 백 장, 수 천장이라는 사실이었다.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사진이 1,000장 가까이 되고

1박 2일 가볍게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강릉 여행을 다녀왔었는데 500장이 넘고,

7박 8일 부산, 경주를 다녀왔는데 1,000장을 훌쩍 넘어버리는 사진들.


가끔 제주도 다녀왔던 이야기, 강릉 다녀왔던 이야기, 부산/경주 다녀왔던 이야기를 할 때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같이 회고하며

그때 좋았는데, 즐거웠는데, 재밌었는데, 별로였는데... 등등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며 회상을 했지

핸드폰 속에 꼭꼭 묶어 둔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 많은 사진들이 핸드폰 속에 잠금 상태로 묵혀있었고,

오랫동안 묵힌 사진들이 잡아먹는 용량과 메모리로 스마트폰이 느려지고,

느려진 스마트폰 덕분에(?) 하루가 짜증스러워졌다니... (물론 100% 일치하는 인과관계는 아닐지라도..)



급한 대로 클라우드에 사진을 백업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진으로 그때의 추억과 감정을 정확하게 소환할 수 있을까?

찰나의 장면을 시각화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더라도,

그때의 우리의 기분과 감정과 느낌을 온전히 다시 소환할 수 있을까..

차라리 핸드폰 속에 가둬지는 기억보다는

나의 마음과 머릿속에 그날의 기분, 감정, 느낌, 분위기 등을 각인시키는 게 더 오래가지 않을까?


2시간 넘게 클라우드 저장소로 쭉쭉 업로드되는 사진들을 멀거니 보다 보니

처음 보는 듯한 사진도 있는 것 같고,

분명히 내가 찍은 사진일 텐데 저런 곳에 갔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사진도 있다.

아마도 핸드폰으로 남기는 것이 기억을 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인지된 탓이 아닐까.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로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록하고 쉽게 삭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고

덕분에 이전보다 마음에 덜 각인시키고 생각을 덜 하게 되더라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는 편리함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진짜' 기억하는 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90년대 중반 중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수학여행 가기 전 필수 준비물이 필름 카메라였다.

필름 한 통이 꽤 비싸기도 했고,

필름 한 통으로 찍을 수 있는 사진 장수도 제한되어 있다 보니

정말 심혈을 기울여 한 장 한 장 찍었던 기억이 난다.

쉽사리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경과 친구들의 모습 비율을 맞춰가며

최고의 사진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때.


그렇게 찍었던 사진을 사진관에 맡겨서 현상되어 나오기까지 며칠을 기다리다

두툼한 사진 봉투를 받아 들고 교실 한편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사진을 돌려 보며

일주일 전, 열흘 전의 여행지의 기억을 소환하며 하나하나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그때.


지금 내 수중에는 그때의 사진이 없기도 하고,

있더라도 본가의 어디 창고 같은 방구석 낡은 박스 안에서 빛바래져 있겠지만

오히려 사진 없어도 그때의 분위기, 친구들 얼굴, 사진 뒤로 펼쳐진 배경들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듯하니,

24장 현상된 사진들을 친구들과 어떻게 나눠 가지면 좋을지 얘기하다가

한 장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얼굴은 떠오르지만 이름은 가물거리는 친구가 생각난다.


이것이 정말,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닐까...


사진 출처: Quotes 'nd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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