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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n 19. 2022

당신의 이름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딸인데,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였을까? 
자식을 낳은 순간부터 엄마는 엄마가 되었을까?




이름에는 묘한 힘이 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던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속에선 그 사람의 모습이 빚어진다. 어떻게 보면 엄마, 아빠, 부모라는 이름은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아들은 처음부터 아들이고 딸도 처음부터 딸인데, 부모는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부모라는 걸 제대로 깨달을 새도 없이 핏덩이 같은 자식을 품에 안는 순간부터 부모가 되어, 자식의 마음속에서 엄마와 아빠의 이름으로 빚어져 간다.


둘째들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자가 있다고 했던가.

나에게도 경쟁자가 있다. 네 살 위의 오빠다. 그런데 오빠는, 이걸 경쟁이라고 말하기도 머쓱할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경쟁자였다. 아빠는 주말도 없이 일을 할 때라 우리의 주 양육자는 엄마였는데, 내가 기억하던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오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내가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하고 빠르게 2인자를 자처할 정도로 찐했다. 엄마는 아들과 딸 모두에게 극진한 사랑을 쏟아부었지만, 오빠에 대한 사랑은 뭐랄까, 아예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사랑이었다. 내가 엿보거나 넘어갈 수 없는, 그런 차원에 있었다고 할까나. 어머어머, 차별받고 컸나 봐, 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엄마는 아들딸 모두 온 마음과 정성을 들여 키웠다.


내가 자라면서 이해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고, 결국엔 그저 수용해야만 했던 사실은 오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엄마와 나 사이의 사랑은 우리의 상호작용과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어떤 날은 맑고 어떤 날은 흐리기도 한, 비교적 상대적인 사랑이었다면 오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외부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기복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한창 마음이 여리고 예민하던 시기엔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써야만 하는데, 오빠는 이유 없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없이 엄마 아빠의 온전한 사랑을 독차지할 때는 미지근하게 마음을 채우던 만족감이 오빠와 함께하면 한쪽 구멍으로 스르르 빠져나가 어느새 마음의 온도가 서늘해졌다. 마음에 뾰족하게 난 가시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 보면 언제나 엄마가 있었고, 오빠에 대한 부러움과 피해의식이 있었다.


난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마음이 못 견디게 쓰라릴 때는 이런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엄마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니야, '엄마'는 그러면 안 되잖아, 라는 심보가 충돌했다. 그러다 문득 그 '엄마'라는 이름이 머리 한구석을 톡 건드렸다. 엄마로 인해 마음이 상처 입고 힘들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린 생각은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것이었다. 순간 빵빵하게 부푼 풍선에서 푸슈슉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마음에서 뜨거운 공기가 한 김 빠져나갔다.


'엄마'가 뭐길래...?

엄마라는 이름이 뭐길래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사실 엄마의 이름은 엄마가 아닌데.


나는 빈 노트를 열어 엄마의 이름 석 자를 적어보았다.

내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또한 너무나 생소하기도 한 이름. 엄마의 이름.

엄마가 나를 생각하며 지었듯, 외할아버지가 첫 딸을 품에 안고 고심해서 지었을 엄마의 이름.

그 이름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사람의 삶에서 아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던 여자에게 하얀 곰처럼 통통하고 보송보송한 아들이 태어났다.

시집살이 때문에 이혼한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 10개월 내내 전봇대 앞에 쭈그려 앉아 펑펑 눈물을 쏟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음에도 엄마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거짓말처럼 순하고 예쁘게 웃는 아이가 품에 안겼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던 여자에게 그 아이는 한 줄기 빛을 타고 내려온 존재였다. 어두컴컴한 마음에 빛처럼 내려와 여자의 마음을 환하게 물들이는 존재였다. 남편도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시집살이에 아이는 온전한 여자의 편이자 위로였다. 아이는 여자의 마음에 안식처가 되었다.


나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엄마를 인식하고 나니 내 마음속에 그려진 엄마의 이미지가 훨씬 다채로워졌다. 이제껏 마음속에 붙어있던 엄마의 이름표는 [엄마] 하나뿐이었는데, 이제는 엄마의 진짜 이름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더 넓고 깊어졌다. 엄마는 이렇게 예쁜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평생 '엄마'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많이 불리는 삶을 주저않고 선택한 것이다.


이제는 마음으로라도 당신의 이름을 더 많이 불러드려야지.

'엄마'라는 이름의 한 가지 색깔로만 칠해졌던 당신의 모습을 더 다채롭게 물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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