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탄생을 지켜본, 나의 가장 오랜 친구
나에게 오빠는 단순히 '오빠'라는 단어만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우리는 우애가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남매로 자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싸우기도 애매하고 친하기도 머쓱한 4살 차이다.
4살 정도 차이가 나면 일단 성장기 어느 시점에서든 서로 노는 물이 다르다. 같이 학교를 다니는 건 초등학생 때뿐이고, 그마저도 내가 1학년일 때 오빠는 무려 5학년이다. 초등학교에서 5학년이면 1학년은 우러러볼 수도 없는 대선배인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오빠는 거의 부모님 대리인 정도로, 엄마의 오더에 따라 쉬는 시간에 날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와 동생의 안부를 확인하고, 다시 우당탕탕 조랭이떡같이 작은 1학년 무리를 헤치고 뛰어 올라가던 뒷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제 3년제인 중학교 고등학교로 넘어가면 오빠랑 나는 거의 볼 일이 없다. 각자의 친구 관계며 학업이 바쁠 때라 동생이나 오빠에게 나눠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오빠는 오빠인지라 부모님의 지시에 따른 동생에 대한 책무가 좀 있었는데, 학교에서 동생에게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하면 출동해야 했다.
한 번뿐이었지만 나는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하교하기 위해 후문으로 몰려가던 학생들이 다시 우르르 역주행하던 그 장면. 그중에 섞여 있던 친구를 붙잡고 물어봤더니 후문 앞 문구점에 무서운(?) 고등학교 오빠들이 있어서 돌아간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오빠들 중 하나는 나의 오빠였다.
우리에게 아주 작은 접점이 생겨난 건 둘 다 직장인이 된 후였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일 때 외엔 굳이 서로 마주할 일이 없던 남매는 이제 가끔은 퇴근하고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이가 되었다. 그건 뭐랄까,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하게 된 자식들이 부모님에겐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애환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우리 남매는 6개월 간격을 두고 결혼을 하며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다.
결혼은 내가 먼저 했는데, 결혼식을 한 2주 앞둔 때부터 오빠는 자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마셨다. 밤에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잠이 잘 안 온다고도 했다. 처음엔 푸하하 왜 저래, 하고 웃어넘겼는데 날이 갈수록 푸석해지는 오빠의 얼굴을 보니 어, 뭐지? 싶은 것이었다.
오빠는 내게 "살면서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해. 무슨 일이 없어도 연락해."라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오빠는 아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우리를 남겨두고 외출했을 때 오빠는 몇 살이든 나의 두 번째 아빠였다. 내게 오빠가 있는 한 남편이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자리가 있다면 바로 이 자리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 번 통화하면 한 시간은 훌쩍 넘기는 사이가 되었다.
오빠랑 이렇게 할 말이 많을 수 있다니, 생소하고도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형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 관계인 셈이다. 나의 탄생을 지켜본 친구이자, 운이 좋다면 나의 죽음까지도 지켜볼 수 있는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픔은 나눠지고, 기쁨은 온전히 함께 누릴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이런 친구를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서른이 넘고서 깨달았다.
슬픔을 연민으로 함께 슬퍼해 줄 친구는 많지만, 나의 기쁨을 정말 온전히 기뻐해 줄 친구는, 10년을 쌓은 관계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그 씁쓸함을 오빠와의 관계에서 위로받는다. 내가 오빠의 행복을 가슴 벅차게 기뻐하듯, 오빠도 나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고 기뻐한다는 것을 안다. 나의 평생을 지켜봐 온 친구가 있다는 것이 내게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준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