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할 수 없음‘을 정의하다.
20대의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가는 데 흠뻑 빠져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공부였고, 책이었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일하는 것도 좋아했다. 너무 많은 것을 좋아했던 나는 남들보다 나 자신을 정의하기가 유난히 어려웠고, 정체성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정의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누군지 너무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을 해도 유독 하나를 잘하는 것도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하나로 정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내 인생이 왜 이럴까 자책한 적도 있었다.
정체성(正體性) :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2019년, 30대에 접어든 나는 여전히 내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코로나를 맞이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운 좋게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매일 밤 2시간씩 꾸준히 공부를 했다. 2-3년간 이어진 그 공부 덕분에 지금도 잘 먹고살고 있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은, 내가 환경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긴 하지만, 나의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내가 속한 집단이 건강하면 나도 에너지가 넘쳤고, 그렇지 못하면 시름시름 앓고 부정적이며 신경질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때는 딱히 정의하지 않았지만, 내 정체성에 대해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다. ‘굳이 하나로 정의되지 않아도 되는 삶’ 정도랄까.
2024년,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는 5년 만에 다시 한번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바로 이 브런치 덕분이다. [브런치 팝업: 작가의 여정] 에 다녀왔는데, 문제는 그 이후다. ’나 뭐 쓰지?’라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팝업에 다녀온 사람들의 글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하니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들도 당연히 많은 고민 끝에 글을 썼겠지만, 나는 주제조차 정하지 못한 채 예비 작가가 된 후로 일주일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러다 브런치에 임시 저장해 둔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발견했고, 이 주제로 한번 글을 써보고 싶었다. 2019년에 저장된 글인데, 지난 5년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왔는지 글로 풀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면서 20대의 나, 30대 초반의 나, 30대 중반의 나를 돌아보니 이제 좀 알 것 같다. 나를 찾는데 유독 유난이었고 어려웠던 이유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귀가 얇고, 오늘 다르고 어제 다르며 내일도 다를 예정이었던 이유를. ‘정의할 수 없음’이 내 정체성이었다는 걸.
대답이 너무 설렁설렁이라 너무 대충 산 것 아니냐고? 그럴 리가. 치열하게 살았다. 주어지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왔고 내 삶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이 쌓여 다방면에서 점점 더 농익은 사람이 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나는 여전히 정의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단어 하나로, 하나의 분야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니까. 그러나 나처럼 정의되지 않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면 좋겠다. 꼭 하나로 정의되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브런치에는 그 순간의 나를 표현할 수 있을만한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짤막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주제도 있을 것이고, 오래도록 이어질 주제도 쌓일 것이다. 내 안에 이미 이룬 것들을 밖으로 꺼내어 잘 정리하고, 앞으로 이룰 것들의 과정을 가감 없이 기록해 나가는 것.
하나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나의 정체성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