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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 Eun Cho Apr 08. 2020

비로소 느껴지는 것

매체의 사각지대

습관은 참 무섭다. 알람 소리보다 먼저 눈이 뜨였다. 평소 출근할 때 평일 기상 시간은 06:40인데, 여기 와서도 내 몸은 그 시간에 맞춰져 있다.

'아니야. 더 자도 되잖아. 너 여유롭게 뒤척일 자격 충분히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뒤척여 보기로 했다. 게을러 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몇 분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원래 오늘은 비가 오는 날로 여행 오기 전 예상을 했었고 어쩔 수 없이 실내에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제주 날씨가 오락가락한다. 그 오락가락함이 내게 햇살 좋은 날을 선물했다.

예측할 수 없는 게 날씨고 인생인 것 같다.


'좋을 줄 알았던 시간이 안 좋은 시간으로,

안 좋을 줄 알았던 시간이 좋은 시간으로'


그러니까 미리 앞서서 예측한다고 맞는 게 얼마나 되는 인생일까 싶다. 그저 주어진 하루에 나를 맞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부터 진정한 뚜벅이 여행의 시작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데, 이번 여행에서는 최대한 음악을 듣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제주의 모든 일상에 귀를 기울여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버스가 움직일 때 나는 덜커덩 거리는 소리도..

- 현지인 승객들의 도란도란 말소리도..

- 버스 안내 멘트로 들려오는 정겨운 정류장 이름도..


여행은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많이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남길 수 있는 사진과 영상은 한계가 있다.

만약 여행 현장의 분위기와 느낌까지 담을 수 있는 카메라가 나온다면, 당장 살 것이다. '매체의 사각시대 : 매체가 담을 수 없는 부분'이 꼭 생기기 마련이다.


- 올레길을 걸으며 느껴지는 것

- 드넓은 바다를 보며 느껴지는 것

- 초록빛 나무와 들판을 보며 느껴지는 것

- 향토 음식을 먹으며 느껴지는 것

- 전통 시장을 구경하며 느껴지는 것


나는 '~하며 느껴지는 것'을 찾으려고 여행을 간다. 하루에 '얼마나 본 것'을 나열하는 여행보다 '어떻게 본 것'을 공유하는 여행을 추구한다.


성산에서 해변으로 가는 201번 버스가 오늘 여행의 효자 버스다.


고성리 제주은행 - 해녀박물관 입구 - 만장굴 입구 - 세화 환승정류장 - 김녕해수욕장


오늘 하루 거쳐갔던 버스 정류장들이다. 성산에서 투숙하는 뚜벅이 여행자들의 맞춤 코스가 될 것 같다.




평소에 아침은 꼭 챙겨 먹는다. 감사하게도, 매일 이른 새벽마다 딸을 위해 수고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딸은 늘 건강한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아침 식사의 힘'을 믿는다. 그동안 큰 병 때문에 잔병치레를 한 적도 없고, 입원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침을 항상 먹으니 컨디션이 좋은 상태로 공부하고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국인들이 자주 쓰는 성어 중에 “早餐要吃好,午餐要吃饱,晚餐要吃少。”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는 “아침은 잘 먹어야 하고, 점심은 배부르게 먹어야 하고, 저녁은 적게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주에서 '잘 먹을 수 있는 아침'을 먹기 위해 세화리로 향했다.


한림 칼국수 제주 세화점,

보말칼국수와 영양 보말죽, 그리고 닭칼국수 이렇게 3가지 국수를 판매한다. 여기에 곁들일 매생이 보말 전까지 딱 4가지 메뉴가 끝이다.


한림칼국수 제주세화점


원픽은 보말칼국수로 정했다. 동시간에 동네 주민 2분이 오셔서 닭칼국수를 시키시는데 심히 갈등이 되었지만 온리유 보말!


주문한 보말칼국수가 나왔다. 사장님이 음식을 트레이에 살포시 들고 테이블에 가져다주시면서 맛있게 드시라고 나를 딱 보는데 반할 뻔했다.. 친절은 덤이고 맛은 기본인가 보다.


보말칼국수


젓가락으로 한번 쓱 들어보니 이야... 탱탱한 면발이 먹기도 전에 군침 가득하게 만든다. "캬~!" 매생이 베이스의 시원한 국물에 동동 떠다니는 보말이 일품이다. '제주 앞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보말의 영양이 전복의 빰따귀를 때린다.'는 메뉴판의 재치 있는 설명이 위트가 있다.


"후루룩" 입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도 찰지다. 가득 채우는 국물의 향.. 반찬도 특히 맛있었는데 김치와 젓갈도 맛있었지만, 무말랭이 장아찌가 특히 맛있고 특이했다. 빨간 무말랭이만 보다가 노란 무말랭이는 또 첨이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지만 면을 남길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너무 배불러서 공깃밥은 못 먹었지만 밥은 무료 셀프 무한 리필이었다.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한림 칼국수가 든든한 아침을 선사했다.


아침을 먹고, 잠시 생각 정리와 독서를 위해 식당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카페로 갔다.


카페 한라산,

제주 당근 케이크로 유명한 새화 해변의 해안 도로에 위치해 있는 카페다.

카페 한라산

외관은 회색빛의 빈티지한 모습이고, 내부는 80-90년대의 소품들인 브라운관 텔레비전, 자그마한 삼보컴퓨터 모니터 등으로 꾸며져 있어 감성 있는 아날로그 분위기였다.



나는 해변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고, 칼국수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먼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어느 정도 뱃속에 공간이 생기고 난 후 드디어 당근 케이크 한 입을 먹었다.


카페 한라산에서 보이는 세화 해변


한 입을 "앙"하고 먹으니 두 겹의 당근 시트 가운데 크림치즈가 스며들고, 시트에 들어 있는 견과류와 채 썬 당근의 식감이 일품이었다. 너무 맛있었다. 만약 내가 제주에서 직장을 다녔더라면, 스트레스 만땅인 어느 날 반드시 나는 이곳에 와서 당근 케이크를 먹을 것이다. 스트레스가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맛이었다.


카페 한라산의 아메리카노와 제주 당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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