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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 Eun Cho Apr 09. 2020

멍 때리기는

최고의 휴식이다

다시 걷기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식당 안에서도 보였던 해변을 따라 형성된 도로를 계속해서 걸어갔다. 시간은 3~4시쯤,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 적당히 선선했다. '해변을 걸을 때 들기 좋은 노래'를 찾아서 한 곡씩 한 곡씩 차곡히 쌓아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높은 하늘,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현무암석이 모여 있는 그림' 한 폭에 내가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온통 푹 빠져서 걸어갔다.


평대리해변에서 세화해변까지

최근 어떤 친구와 '멍 때리기'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멍 때리기'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행동'을 말한다. 친구는 이 행동이 우리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이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뇌가  일하지 않고 쉬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생기를 되찾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껏 '멍 때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어떤 일을 하면 항상 '일의 다음'을 생각했었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하면 잘 될까?'를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는 데 온종일을 보냈던 것 같다. 직장에서의 내 주된 업무는 고객과의 전화 통화다. '걸려 오는 전화'가 '먼저 거는 전화'보다 훨씬 많으니, 나는 총 맞는 것처럼 고객들의 전화 총알을 하루 종일 막아내야 했다. 워낙 능동적으로 찾아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리어 수동적으로 누군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서 때마다 해주어야만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통화의 주도권을 나의 것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일적으로 :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찾아서 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고, 관계적으로 :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사람, 눈치껏 잘 맞춰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다. 이밖에도 무궁무진하게 많은 사회의 요구 조건들이 있는데,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생각하고 검색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지?' '그런 생각이라는 업무'는 퇴근 시간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무한 야근을 한다. 과연 하루 중에 단 몇 분이라도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쉬어봐.'라고 시간을 내어준 적이 있었던가.  


'멍 때리기'는 필요하다. 미국의 뇌과학자인 마커스 라이클 교수가 '멍 때리기'의 의학적인 정의를 내렸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는 '뇌가 활동하지 않을 때 작동하는 일련의 뇌 부위'이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자아 성찰, 자전적 기억, 사회성과 감정의 처리 과정, 창의성을 지원하는 두뇌 회로'로서 편안히 휴식할 때만 작동한다고 한다.


나는 여행이 '일상을 떠나 일상과는 반대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잘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트래블러들에게 영감을 주고 더 창의적인 일들을 하게 하는 여행'을 만드는 것이 나의 직업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그저 가만히 있을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주도의 푸른 하늘과 바다, 색색의 자연까지 함께여서 더없이 행복하게 걸어갔다.


카페 록록


카페 록록,

'이곳은 제주도인가? 동남아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카페다. 내부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꾸며진 창문과 촛불을 닮은 천장등, 그리고 기다란 식물 화분들과 다양한 색깔의 글라스들이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카페 록록은 하도리에 위치해 있어 세화리에서는 거리가 좀 있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낮긴 하지만, 카페 앞에 바로 주차장이 있으니 운전해서 찾아가면 된다.


이 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록록 에그 타르트'다. 하루 수량 제한이 있으니 타르트를 맛보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찾아가야 한다.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과, 에그 타르트 하나를 주문했다.


카페 록록의 커피와 타르트


우선 커피는 커피고, 타르트 먼저 한 입 먹어봤다. "와... 녹는다." 타르트 속 필링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사장님은 커스터드 크림의 장인이신 것 같다. 에그 타르트가 시그니처이긴 했지만, 타르트 맛을 보니 커스터드푸딩 시리즈도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카페에 오기 전 해변에서 '멍 때리기'를 잘 실천하였기 때문인지, 운치가 좋은 이 카페에서 글을 쓰고 싶어 졌다. 해변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 노트북을 꺼내어 생각 일지를 썼다. 다른 때보다 더 풍성하게 나와 나의 주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동시에, 눈을 뗄 수 없는 노을 지는 해변을 보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멍을 때리다가 글을 쓰다 멍을 때리다의 반복이었다.


카페 록록에서 바라본 해변의 노을


뉘엿뉘엿 해가 져가니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제일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 다시 걸어갔다. 마침 일몰 시간을 막 지났을 때였고, 바다가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오늘 하루 종일 내 단짝인,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버스 번호, 201번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은 숙소 안에 있는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숙소에 있다는 편리함도 좋지만, 무엇보다 검증된 맛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샤오츠,

내가 이 숙소를 선택했을 때 꼭 먹어봐야 할 '먹킷 리스트'에 찜해둔 식당이다. 20년 내공의 중식 셰프님이 운영하는 식당으로서 짜장면, 짬뽕이 아닌 홍콩/대만 요리를 제공한다. 주메뉴는 홍콩식 우육면과 대만식 우육면이 있었다. 이번에 나는 이 집의 주메뉴를 시키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보기로 했다. 워낙 중식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메뉴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타이완식 탄탄면'을 선택했다. 선택을 좌우한 주된 이유는 식당에서 흘러나온 노래 때문이었다. 노래는 가수 유덕화의 '忘情水 : 망정수’였다. 이 곡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타이완 감성 영화 '나의 소녀시대'에서 여주인공 '린전신'이 좋아하던 노래였다. 노래를 듣다가 식당 안을 둘러봤는데, 마침 '나의 소녀시대' 영화 포스터가 붙여져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러다 중국 유학 시절, 학교 근처에 있던 작은 항저우식 만둣집에서 마장탄탄면을 즐겨 먹었던 기억이 났다. 가격이 5위안이었을 거다. 면, 마장, 그리고 잘게 썰어 놓은 파가 끝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문득 그 맛이 그립기도 했다. 내가 타이완식 탄탄면을 선택한 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탄탄면이 나올 때까지 예쁘게 걸려있는 식당 안 홍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오츠


드디어 탄탄면이 나왔다. 내가 먹었던 그 간단한 마장탄탄면 보다 토핑도 많고, 전체적인 양도 많았다. 특히 잘게 썰은 고기 토핑이 무척 많이 들어 있었다. '쓱쓱' 비비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수타면은 윤기가 나고 탱탱했다. 파의 알싸한 맛과 마장의 고소한 맛이 잘 어우러진 맛이었다. 이 맛은 지금껏 내가 우리나라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한국식으로 변형된 중식이 아니라 실제 중식이라서 너무 반가웠고 기뻤다.


샤오츠의 타이완식 탄탄면


탄탄면을 먹으며 지난 유학 시절을 반추해볼 수 있어서 좋았고, 내가 참 좋은 시간을 보냈던 거구나 싶어서, 마음이 참 행복해졌다. 추억이 담긴 음식을 다시 한번 먹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고, 마음까지 꽉 채워진 뿌듯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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