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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Sep 04. 2022

학부모와 선생님 사이

22.09.04

 37개월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서서히 학부모가 됐다. 아이가 20개월이 되면서 기관 생활을 시작했고 나는 “OO이 어머님”으로 또 다른 호칭이 생겼다. 어린이집에서 알게 된 아이의 엄마들과 처음 교류를 할 때 선생님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 내가 선생님이라는 걸 알면 불편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학부모 입장에서 선생님을 험담하고 싶은데 내 눈치를 보느라 말을 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선생님이 가져야 할 덕목, 가치, 태도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에 대한 윤리적 잣대가 타직업에 대한 기대보다 조금 더 높게 설정되어 있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다.  “OO이 어머님”이 된 나는 선생님으로서의 정체성은 내려놓기로 했다.

 내가 선생님인걸 아는 지인들은 조언을 많이 구했다.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과 수많은 교육법과 교과서에 나온 것을 적절히 조합해 알려줬다. 사이사이에 전문가로서  이만큼이나 알아~하는 허풍을 양념으로 쳐가며 조언을 건넸다. 우리  어린이가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강해지고 말을   알게 되자 그동안 내가 누군가에게 건넸던 수많은 조언을 돌아보게 되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육아 현실은 교과서에 나온 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그동안 나에게 조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집에서 우리  아이와 씨름하고 있는 나를 본다면 뒤돌아 웃을지도 모르겠다. 육아는 책에만 나온 것처럼 되는  아니란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을 때쯤 나는 선생님으로서의 직업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학부모와 선생님 사이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2학년 아이들을 만나고 2주가 흘렀다. 몇 안 되는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교실에 있는 아이들 선생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실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빠른 아이, 느린 아이, 조용함을 지키는 아이, 온 힘을 다해 에너지를 뿜어내서 자신을 표현하는 아이, 힘든 걸 몸으로 말해주는 아이. 선생님으로서 학습과 생활습관을 위해 규칙을 내세워 단호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본다. 한 번은 알림장을 쓰는데 조금 길게 쓰게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이 한글을 모르는 아이가 없었고 4번까지 썼을 때 5분도 안 돼서 다 쓰고 검사받으러 나오는 속도에 놀라 다음날 7번까지 썼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한숨을 토해냈지만 속으로는 ‘그래, 힘든 것도 해봐야지. 써봐라.’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모두가 말없이 연필 소리만 들렸는데 갑자기 A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엉엉 울기 시작하면서 교실 바닥을 헤엄쳐 다녔다. A를 본 다른 아이들이 달려와 나를 호출했다. 예전 같으면 ‘아니 뭐 저런 애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당장 일어나라고 화를 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기다고 곧이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A는 자신이 해낼 수 없는 크기의 과제를 받으면 마음이 버거워지는 아이구나, 내가 하나하나 아이들을 살피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건 알림장을 다 써서 보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A를 다독여주고 힘내라 말해줘야 하는 상황이라 판단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잠시 기다려주자고 이야기해두고 나 역시도 알림장 검사를 계속하며  A를 기다렸다. 울음과 분노가 잦아들고 교실을 떠나는 아이들이 속속 생겨 텅 빈 교실이 되었다. A에게 다가가서 물어봤더니 “갑자기 할 게 너무 많아져서 화가 났어요.”라고 대답한다.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한 뒤 볼펜을 들어 알림장을 폈다. A 대신에 알림장을 썼다.

“오늘 알림장이 조금 길었어요. A가 힘들어해서 기다려주기로 했어요. 덜 쓴 알림장 내용은 하이클래스로 보세요.”

 이게 맞을까? 내가 부모라면 알림장에 써진 글을 받고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A가 어떤 일 때문에 힘겨워하는지, 화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는 부모가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림장은 사소한 과제다. 이걸 꼭 안 하면 안 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다만 한걸음 물러나 주면서 A에게 모든 걸 완벽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인내심과 기다림을 내가 먼저 보여줘야 A가 따라와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림을 모르는 아이에게 본보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A가 나를 천천히 따라와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우리 집 어린이가 어린이집에서 활동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집에서의 모습만 알고 있어서 어린이집 선생님이 해주는 또 다른 시각의 말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우리 집 어린이는 모범생 이어야 하는데, 선생님의 아이니까 말을 잘 들어야 할 텐데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항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아이가 아직 새로운 것을 대할 때 천천히 해보고 싶어 해요. 다른 아이들이 하는 걸 지켜보고 그 뒤에 하고 싶어 할 거예요. 성격이 그런 거 같아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는 않았다.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 되어 어떤 말도 꺼내기 힘들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이 조금 기다려주시기를 바랐다.

 근무지까지 왕복 1시간 30분을 운전한다. 복직하고 첫 출근날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이 있다. “아이들은 자란다.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지 말자.” 어른과 다르게 어린이는 커가는 과정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문제 아닌 문제들이 꽤 있다. 그때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다려주고 인내해주는 것이다. 엄청나게 삐뚤어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면 붙잡아 뜯어말려야 하지만, 아직 어려서 겪는 과정 중 하나라고 보면 충분히 기다려주는 게 답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일에 매달려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길, 어린이의 성장의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선생님이 되길 다짐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 서게 되면서 깨달은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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