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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Oct 10. 2022

상담의 기쁨과 슬픔

22.10.10

내가 누구를 상담할 자격이 있을까? 부모가 되고 나서 내가 이 아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지,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상담해줄 수 있는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20분 만에 확언을 담은 조언을 전달해주기는 어려울 거라 여겼다. 아홉 살 인생은 짧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아주 길다. 그에 얽힌 가족사는 당연히 더 복잡하고 긴 이야기일지 모른다. 20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실 안에서 가장 밀접하게 아이의 사회성을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로서 상담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교사는 일 년에 두 번 학부모와 상담 시간을 갖는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상담에서 전화 상담으로 바뀌었다. 얼굴을 보고 상담하면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가 많지만 전화는 사실 교사 입장에서 조금 더 편하다. 그리고 사실 꼭 이번 주 20분만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화를 끊은 다음 연계해서 상담도 가능하다. 상담의 연속성을 위해 물꼬를 터는 전화상담의 시간이 나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조금 더 번거로워지는 과정이겠지만 한 번의 전화가 어려울 뿐 그다음 전화는 쉬워진다. 코로나로 인한 전화 상담이 어쩌면 더 부모와 교사 간의 관계를 잘 이어 줄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2학기에 복직한 교사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끝물에 바뀐, 한 달밖에 아이를 보지 못한 사람과 무슨 상담 전화를 하겠냐 싶어 상담을 신청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저학년은 보통 전원이 상담 신청을 하는데 18명의 학부모와만 상담했다. 신청은 17명이 했는데 1명은 내가 요청해서 추가로 하게 되었다. 교사와 상담 전화를 할 때 10분도 지나지 않아 끊었다,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와 호호 웃으며 서로 의미 없는 인사말만 하고 마무리하고 끊었다, 는 말은 아주 긍정적인 상황이다. 그 아이는 정말 평범하게 잘 지내고 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교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거나 상담이 아주 귀찮아 대충 하는 경우는 제외하겠다) 20분 동안 나누기에도 모자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상담 전화의 가장 어려운 점은 끊는 지점과 마무리 방법이다. 나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 입장에서 짧은 순간에 제시할 수 있는 뾰족한 해결책을 알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저 제삼자로써 관찰한 바를 전달하는 쪽이라 부모에게 내가 가진 공을 넘기는 일을 할 뿐이다. 우리 학교에는 wee클래스가 있고 전문 상담교사가 있다. 중대한 문제를 가진 아이들의 경우에 전화의 마무리는 늘 wee 클래스로 넘기곤 한다. 2학기에 들어와서 우리 반에 wee클래스를 방문한 아이들은 5명이다. 그중 3명은 미술치료를 받기로 했다. 1학기 선생님께 전혀 전달받지 못한 부분을 2학기 교사인 나에게서 전달받았고, 그 부분은 사실 가정에서도 드러나는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교사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아이 옆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란 너무나 어려운 문제라 유야무야 지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 대부분 아이의 문제를 “아유 걔가 왜 그럴까요.”정도로만 취급하기 쉽다. 문제는 늘 옆에 있기 때문에 자세를 고치고 앉아 문제에서 떨어져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wee클래스 선생님의 훌륭한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다. 부모 상담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래서 아이 상담뿐만 아니라 부모와도 통화를 하신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조언이나 처방을 내렸는지는 비밀상담이라 나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 반에 틱을 심하게 앓고 있는 아이가 있다. 부모는 아이의 틱 검사결과지만을 보내왔다. 아이만 검사해서 될 일이 아니라 여겨졌다. 부모님께 “아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물어보셨나요?”라고 했더니 묵묵부답이었다.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어떤 양육태도를 가졌는지, 아이를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아이의 문제만 바라봐서는 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남을 상담하고 있자니, 내가 무슨 대단한 교사라도 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 엄마의 역할로 변신해 내 아이를 하원 시키면서 매일 우리 아이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있는 한낱 부모에 불과하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는 아이에 대한 작은 이야기도 세심하게 관찰해서 말씀해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실 교사와 부모의 중대한 역할은 ‘기다려주기’라고 생각하는데 어디까지 기다려줘야 할지, 방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선을 명확히 긋기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남을 상담해주는 것이 의미가 있겠느냐 하며 자신감을 잃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상담기간 동안 18명을 상담하면서 받은 피드백은 모두 감사하다,였다. 상담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 상담이 필요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을 때는 그제야 아이와 이야기해보고 방향을 잡았고 아이가 바로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은 내가 하는 일이 헛되지만은 않구나 느꼈다. 잘 관찰했고 적절한 시기에 개입을 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냈던 편지에 있는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도움이 되기 위한 작은 관심과 말, 행동을 바꾸면 아이들이 변한다. 그걸 아이의 부모와 함께 나눈다. 번거롭고 조심스러운 이 과정을 통해 나는 교사로서의 삶, 내가 나 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부모로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제삼자의 입장에 서 있는 교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 있어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수업보다는 우리 반 아이들을 관찰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워야지, 하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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