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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mu Apr 04. 2017

019 이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요가수업은 수강생이 나뿐이었다. 뜻하지 않은 일대일 수업이었다. 난감했다. 괜히 선생님께 미안하달까. 나만 아니면 한가롭게 쉬실 텐데 그녀도 딱. 나는 나대로 멋쩍어 혼났다. 오직 나를 위해 구령을 붙이고, 동작을 설명하고, 시범을 보이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선생님의 눈길이 내 몸에 콕콕 박힌다. 꾀를 부릴 수도 없다. 긴장이 돼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멈출 수도 없고. 하아-. 식은땀. 일대일 수업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묵혀둔 질문이라도 하자, 싶어 아치자세(Urdhva Dhanurasana)에 대해 물었다.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가 허리와 엉덩이를 힘차게 들어 올리면서 몸을 활처럼 휘는 자세. (사진 참조)


내 고민은 팔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면 숙련된 요기들은 팔을 땅과 수직으로 곧게 펴던데, (그럼 몸 전체가 봉긋한 오름의 형세가 된다. 아주 아름답다.) 나의 경우 팔이 자꾸 사선으로 휜다. 몸 전체로 보면 야트막한 뒷동산 모양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양이라 답답하던 차여쭈니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문제없어요.” 순간 아연.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나도 사진 속 요기들처럼 팔을 곧게 펴고 허리도 둥글 둥글게 말고 싶다고요.     


(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 사진출처: 이효리 블로그)


타이르듯 말하는 선생님의 요지는 이랬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일종의 화보로, 찍히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이 많다. 실제 수련과 거리가 있다. 그러니 애써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체형은 모두 다르니 자신에게 맞춰하면 된다. 올바른 방법으로 동작을 취하고 자극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이 마지막 말, ‘충분하다’는 표현에 새삼 놀랐다. 충분하다는 건 도대체 뭔가. 사전에는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고 쓰여 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이미 가득한데 왜 난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렸을까? 차고 넘치도록.     


문득 난 요가를 진심으로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닌데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험 보는 수험생처럼 기초를 탄탄히 하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매사에 진지하고 치열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열심히 하면 좋지) 하지만 과도한 목표로 인해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마저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다. 요가가 주는 정신적 고양, 고요하고 단순한 세계, 자유로움, 가벼움, 넉넉함을 난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건 정말이지 손해 보는 짓이다. 즐기지 못하면 손해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무인양품 디자인의 철학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라고 한다. ‘이것이 좋다’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에 놀랐다. 더 많은 장식, 더 많은 기능이 아니라 생활 속 쓰임에 최적인 것만 고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욕과 절제, 체념이 아닌 '선택'이다. 이로써 우리는 더 깊이 사물을 경험하고 만족하고 즐 수 있다. 아주 멋지다. 무리해서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인양품을 완성하는 단단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만사가 그렇다. 돈을 얼마큼 벌어야 충분할까. 일은 얼마나 해야 충분할까. 주변의 인정은 얼마나 받아야 충분할까. 옷장에 옷은 얼마나 많아야 충분할까. 마음 나누는 친구는 몇 명이나 있어야 충분할까. 하루 식사는 얼마나 먹어야 충분할까. 말은 얼마나 해야 충분할까. 경계 없이 많을수록, 빠를수록, 클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 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즐기지 못하면 손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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