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기 싫다~”
길을 걷다 말고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다. 오늘은 요가학원 가는 날이다.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이 무겁다.
“아, 가지 말까?”
또 이러고 있다. 겨우 집어삼킨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짜증스럽다. 바로 집에 가면 따뜻한 이불속에서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건데. 나는 나를 유혹한다. 요가학원을 가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핑계는 무엇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간다. 가야만 하니까. 귀찮아서든, 두려워서든 결국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도 까무러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학원을 빠져나올 땐 “키키키” 헛웃음이 났다. 처음 해보는 동작이 있었다. 드러누운 자세에서 목을 뒤로 젖혀 바닥에 정수리로 박고, 다리를 접어 몸을 지지하는 가운데 목 뒤로 깍지를 쥐는 것이다. (사진참조) 와, 그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깻죽지는 심줄 하나하나가 끊어질 듯 아프고, 허벅지는 벽돌을 세 개씩 쌓아 올린 것처럼 무거웠다.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아늑해진 정신머리로 겨우 붙든 생각이 ‘아, 못해먹겠다. 그만하자’여서 다 포기하고 무너져 내렸다. 헉헉헉, 경망스러운 숨소리. 도망치고 싶다. 그 와중에 선생님의 다그침은 나를 한 번 더 끌어올리고, 그렇게 으라차차 시도해보지만 금세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젠장.
그건 정말 생존본능이 아닐까, 그 이상은 위험하다는 걸 몸이 감지해서 포기해버린 게 아닐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너무너무 아프다. 무섭다. 그러니 요가학원을 가기 전부터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깨지고 나면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긴다. 할 수 있겠다, 싶어 진다. 박살이 났는데 묘하게 안도한다. 수업 끝자락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할 수 있겠다. 이 기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요가는 수련이다. 수련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다. 반복하면 된다. 내 단점과 두려움을 오늘처럼 정면으로 맞서면서 반복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형편없어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지는 것이다. 멀리 돌아갈 생각을 하면 지금 좀 부족해도 어떠랴, 싶다. 조금씩 완성해나갈 전망이 생겼다. 요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수련을 게을리했다면 두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하지 않으니까 초조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이키의 슬로건은 새삼 대단하다. “Just do it(그냥 해!)” 정말 그렇다.
이런 경험은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쓰고 싶은데 써놓으면 엉망이다. 첫 문장부터 헤맨다. 자꾸 뒤척이면서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럴 땐 정말 울고 싶어 진다. 막막하다. 두렵다. 하지만 ‘퇴고하면 돼’라고 생각한다. 열 번쯤? 수무 번쯤, 갈고닦아질 글이다. 그러면 조금 가벼워진다.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한참 공을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된다. 마음 가는 대로 써보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되뇌는 말.
수련이다. 모든 건 과정 속에 있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었다.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쓰여 있었다. 읽어도 모르겠고, 난해하고, 지루하고, 바보가 된 것 같고, 어쩐지 싫은 느낌.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라 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무섭고 위험한 일이기에 그렇게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혁명으로서의 읽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니 오로지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고독하게 더듬으며 읽어가야 한다. 완전히 새로워지기 위해. 읽기 전으론 돌아가지 않기 위해.
(마침 어제 본 영화 <밤의 해변에서 홀로>에서 준희(송선미)는 영희(김민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싸우듯 읽어야 해”)
그러니 요가학원 빼먹지 말자. 조금씩 나아가자. 그것이야말로 요가의 묘미지. 좌절하지 말자. 다시 하면 되니까. 또 하면 되니까. 결코 멈추지 않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