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를 보면 때때로 기가 찰 때가 있다.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하는 기분이 (더러, 비교적 자주) 들기 때문이다.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하면서 다소 엉뚱한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이어간다. 이렇다 할 메시지도, 주장도, 결론도 없이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하고 끝나버린다. 당황. 그럴 때면 ‘이런 글로도 원고료를 받을 수 있구나’, 솔직히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이런 하루키 에세이를 아주아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죠.) 마음에 먹구름이 낄 때면 하루키 에세이가 약이다. 한가로운 평일 오후, 깡통을 차며 (하루키 아저씨와)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여유롭고 평화롭고 다정한 공기가 주위를 감싼다. 아주 기분이 좋다. 그러니 생각한다. 글을 쓸 때면 조금 힘을 빼도 좋겠구나, 라고. 실제로 흉내도 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경지'인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루키 다운 글은 하루키만 쓸 수 있다. 그렇다면 나다운 글은 무엇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한편 하루키 에세이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安西水丸)의 그림이다. 둘은 절묘한 콤비다. (이런 표현이 적절치는 않겠지만) 덤앤더머 같달까.
안자이의 그림 역시 첫 인상은 ‘정말 대애충- 그렸다’ 이다. 힘을 쭉 빼고 뭐 이런 겁니다, 하면서 의미전달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싶은 대강대강한 그림들이다. 섬세함과 디테일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하면 너무 가혹하지만 대체로 그렇죠?하지만 그게 매력). 지난해 10월 도쿄여행에서 그의 에세이집을 사왔다. 초딩의 그림일기를 보는 기분이랄까. 채색 또한 얼마나 조악한지 ‘이렇게 라면 나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안다. 이 역시 하나의 경지라는 걸. 결코 흉내 낼 수 없죠.) 그의 그림엔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창작의 고통이 일도 보이지 않는다. 이게 아주 좋다. 보고 있으면 명랑하고 자유롭고 소소한 기쁨이 퐁퐁 솟는다. 묘하게 사람을 안도시킨다. 애틋하고 따뜻하다. 그러니 더 이상 그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2014년 3월19일, 71세를 일기로 뇌일혈로 별세.)
"저는 반쯤 놀이 기분으로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더군요. 진지함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흔치 않은 스타일이죠. 일본인에게는 진지한 것이 좋고, 진지하지 못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의 태도로, 진지하게 그림과 마주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불단에 기도를 한 뒤 작업에 들어가는 도예가가 있는가 하면, 저는 작업 선반을 걷어차며 일을 하는 편이라고 할까요."
-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中
요가 수업 때마다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힘을 빼보세요.”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워야지. 아프니까 자꾸 웅크리는 자세가 된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거의 무의식의 일. 그러다 슬며시 힘을 빼보면 중력이 몸을 끌어내리면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온다. 무시무시하다. 형벌을 받는 기분이다. 그때 깨닫는다.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게 더 힘이 드는구나.
좀 더 숙련되면, 세상살이에 좀 더 노련해지면 나도 힘을 뺄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글쓰기에도, 타인과의 만남에도 편안함을 주고 싶은데. 그러나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