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incstory Aug 01. 2016

1화. '떠남'은 '시작'입니다

D-7 출국일

떠남은 시작입니다

핀란드로 떠나게 됐다는 소식을 지인들에게 알렸을 때 보통 반응은 두가지였습니다. "부럽다", "애기 엄마가 고생이겠네!"


유학생 와이프의 신분으로, 갓 6개월 난 아이를 데리고 핀란드로 떠나야 하는 저 자신을 이제 남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요. 1년반 전, 캘리포니아에서 유학중인 친구네 집에서 3일간 머물며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든, 무엇을 했든, 외국에 오니 난 그냥 동양인일 뿐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그럴겁니다. 내가 갖고 있던 사회적 경험, 노하우가 적용되지 않는 곳. 그래서 나에 대한 인정과 자존을 이젠 직장의 이름으로 출신학교의 명성으로 채울 수 없는 곳.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문법을 적용할 수 없는 그 곳에서 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 입니다.


저희가 가게 되는 곳은 핀란드 북부에 위치한 로바니에미라는 곳입니다. 전세계 어린이가 산타할아버지에게 카드를 쓰면 도착하는 산타빌리지가 있는 곳입니다. 이틀동안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있는 곳, <꽃보다 청춘>에 나온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핀란드 북부에 위치한 로바니에미 ⓒ구글맵


이사라는 것을 처음해보는 데다, 외국에 나가게 되니 싸는 짐보다 버리고 가야 할 짐이 더 많았습니다. 선편 컨테이너를 사용해도 되지만 수백만원이 드는 데다, 운송 비용에 육지에 도착하면 트럭운송비까지 더해져야 하는 탓에, 가장 간소하게 몇 박스만 EMS로 부치자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박스의 개수는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3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간장 한 병도 다 안쓰던 저희 부부가 40만원 어치의 식료품(그곳에 참기름이 없어! 고추기름 사자! 한국 카레가 없어! 아기 보리차 사자! 고추장 세일하네!)을 사고, 신발을 용도별로 챙기고, 이불에, 옷짐에, 각종 생활도구들을 챙기다보니 박스의 개수는 출국을 일주일 앞둔 지금까지 계속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값비싼 김치냉장고도, 거실을 꾸며주던 잡지꽂이도 이젠 다 나눠줘야 할 물건입니다.


하지만 아낌 없이 나누어줄 것도 많았습니다. 100여만원이 넘는 냉장고도, 신혼사진을 넣어두던 액자도, 주간지를 넣어두던 잡지꽂이도 들고 가기엔 거추장스럽고 그냥 버리기엔 누군가에게 필요할 물건들입니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집안 가득 꼭 쥐고 있던 것들이 참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며칠 전 냉장고를 비우며 생각했습니다. "참, 방만하게 살았구나"라고 말입니다. 몇년간 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해야만 비로소 버려지는 물건이라니...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물건을 사고 쌓아두고 살아야만 했을까요. 이래서 종종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날에는 손에 쥐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온갖 종류별로 사는 옷이며, 신발이며 각종 물건들이 참 부끄러워지는 순간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떠나야만 '시작'할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의 묘수입니다. 직장생활 6년차, 결혼 3년차... 사회생활도 결혼생활도 안정권에 들어선 우리가 익숙한 것을 집어 던지고 '시작'이라는 그 오래전 경험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니 제법 설레기도 합니다.


'시작'이라는 경험을 잊어버린지 오래된 누군가에게 이 연재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