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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cstory Aug 21. 2016

5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의 끝, 다시 일상으로-

걸어도 걸어도 나와 늘 일정한 거리로 떨어져 도망가는 밤하늘의 달... 어쩌면 변화를 좇는다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몇 보 더 가까이 가보겠다고 폴짝폴짝 뛴다해도 계속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상태. 그 하늘을 향하던 눈을 거두고 다시 땅을 보고 걷다가도 다시 한번 더 하늘을 바라보는 무모함 같은 것.

밤 9시가 넘었지만 백야현상으로 바깥이 환하다

핀란드에 짐을 푼지도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언제 직장을 다녔고, 언제 서울에서 살았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낯선 땅 낯선 방에서 잠을 자고, 낯선 화장실에서 몸을 씻습니다. 낯선 주방에서 쌀을 씻고, 낯선 마트에서 물건을 집습니다. 낯선 활자(핀란드어)가 가득한 환경이지만 어찌됐든 사람이 사는 동네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창문 밖에 온도계를 붙여놓아 외출 전에 기온을 체크할 수 있다.

사람들이 "핀란드 가니 좋으냐"라고 물어오면 "결혼하니 좋으냐"라는 질문처럼 아직은 대답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저 제가 할수 있는 대답의 수준은
제가 좋아하는 어느 웹툰 속 대사처럼,

"이게 말이야 좋기도 하다가 싫기도 하다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러다가 싫기도 하고 막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진짜 좋은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정도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 써니싸이드업 '부부생활' 웹툰 중

사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할 땐 감수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다 못해 한국에서는 전자도어를 사용하다가 이곳에서는 열쇠를 늘 들고 다녀야 한다든지, 저 같은 뚜벅이가 사랑하던 버스와 지하철이 늘상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아기 자는 틈에 로켓배송으로 기저귀를 집앞까지 주문하는  편리함과 작별해야 했던 상황이 그렇습니다. (참,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볼일이 급해 빈손으로 화장실로 뛰어갔다니 문 앞에 50센트를 넣어야만 들어갈 수 있어 분노했던 상황도 꼭 적어둬야 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햄버거가게(Hesburger)안에서도 심지어 버스와 택시 안에서도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류장이 아니라 달리는 차(기차, 버스, 트램, 택시 등) 안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와이파이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최근 서울시가 주요 지하철역 근처에 무료 공공와이파이 설치를 추진하고 있는데, 핀란드는 이미 정지된 곳이 아닌 달리는 기차 안까지 꽤 빠른 속도의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핀란드 물가가 생각처럼 비싸지 않습니다. 택시 기본료는 한국의 고급모범택시 수준인 6.9유로(물론 아주 급할때 외엔 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커피(kahvi)한잔은 2유로, 식사는 1인당 10~20유로 내외에서 한 메뉴 정도는 시킬 수 있습니다. 워낙 살벌했던 서울 물가를 생각하면 조금 더 비싸거나 비슷한 수준입니다.


아기용품은 더 싼편입니다. 한국에서는 국산 분유 800g 들이 한통에 3만원 중반대로, 10일에 한통씩은 먹으니 한달에 10만원 가량을 분유비로 지출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600g에 7유로 선이면 분유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기저귀 가격 역시 한국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한국 돈으로 2만원이 넘지 않는 가격의 기저귀
600g 가루 분유가 7유로 선이다. 반면, 한국 분유는 800g에 3만원대.

어찌됐든 이 난리법석을 피우고 핀란드로 떠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면 그저 매일 세 식구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 이 크림치즈가 맛있는지 저 크림치즈가 맛있는지 토론하며 장을 본다는 것, 노을이 예쁜 날 다리를 건너 저 시내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 요즘 저희의 일상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 남편의 학기가 시작되지 않아 널널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기숙사에 짐을 풀고 처음 해먹은 끼니. 물론 밥도 많이 해먹습니다.
마트 가는 길이 이렇게 낭만적인 사진으로 찍힐지 몰랐습니다.

아무튼 이곳에 오기까지 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고, 남들이 얻기 힘들다는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지만, 엄청난 결정을 하고 비싼 대가를 치룬 것에 비해 우리의 삶은 지극히 소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또 그렇게 다시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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