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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ncstory Sep 06. 2016

6화. 하늘과 바람과 오로라와 詩

로바니에미의 오로라 뜬 밤.

숨을 가만히 하고 커다란 연둣빛 손바닥 아래 서서 온 몸으로 하늘을 지탱해 봅니다. 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다른 한쪽에서 스르르 커다란 손이 나타납니다. 연두빛 광채가 우리의 머리 위로 무겁게 하늘을 덮더니 이리저리 춤을 추며 세상을 뒤흔듭니다. 그 옛날 밤을 지키던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며 인간의 작음을 고백했을까요.

기숙사 뒤편 발코니에서 바라본 오로라

지난 몇주가 그랬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한국처럼 편리한 삶의 기틀을 만들어놓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자꾸만 뜻대로 되지 않다보니 자존감은 뚝뚝 떨어졌습니다. 특히, 어른은 양보하며 살 수 있어도 아이 것을 양보할 순 없었습니다. 아플 때 병원에 어떻게 가야하는지, 어떤 절차를 밟는지 몰라 무작정 종합병원 소아과와 헬스센터에 쳐들어가 간호사와 안내원을 붙들고 다짜고짜 묻기도 했습니다. 용기 있기도 했지만 처절하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아직 핀란드에 세금을 내는 시민이 아니니 제약이 많았습니다. 당연했던 한국에서의 권리가 아쉬워지는 순간도 여러번 마주했습니다.

동네 헬스센터에 찾아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을 물었다
'아프면 어디로 가야할까?'를 설명한 종합병원 내 포스터

게다가 한국에서 맞벌이를 하던 시절처럼 소비를 할 순 없는 형편이 되니 이거 마음이 계속 옹졸해지고 있었습니다. 6.69유로 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냐 마냐로 남편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안 사준 쪽은 제가 아니라 남편입니다) 사실 저희가 돈 쓰는데 약간의 스트레스가 더해진 까닭은 재정상황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원화로도 가계부를 안쓰던 저인데, 유로로 가계부를 써야 한다니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다시 해보니 이 귀찮음을 역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 바로 핀란드어로 가계부 쓰기입니다!

핀영 사전을 찾아가며 가계부를 쓰고 있다.

핀란드어 가계부를 쓰니 좋은 점은 생활에 필요한 단어 공부가 된다는 점과 이곳 화폐 개념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몇 유로부터 지폐가 있는지도 모르던 접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되는 유학생활에 계획적인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구요.

My memory 번역기

단어를 찾다보니 아주 맘에 드는 번역 사이트도 하나 찾았습니다. 문장도 번역되고, 예문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엔 브랜드 이름까지 번역하는 바보 같은 짓도 했지만, 이젠 영수증을 읽고 대충 불필요한 부분을 가려낼 수는 있게 됐습니다. 영수증이 쌓이는 날은 제 숙제가 쌓이는 날입니다. 하루 빨리 단어를 찾지 않고도 가계부 쓰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핀란드어 가계부는 저만의 소중한 단어장이기도 합니다

한편, 핀란드는 중고매장이 정말 많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을 한국에서 나다가, 갑자기 바뀐  핀란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헬싱키에서 급히 1.6유로에 산 야상 점퍼는 아직도 잘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기숙사에 들어오자마자 식탁과 의자, 책장 등을 구할 수 있던 곳도 바로 Kontti(적십자) 중고매장이었습니다.

아이용품도 저희에게는 다시 구입해야 하는 품목이었습니다. 카시트는 너무 무거워서 출국날 공항에 저희를 배웅나온 친척분께 드리고 왔고, 유모차는 현지에 맞지 않아 다시 구해야했기 때문입니다. 휴대용 유모차를 하나 들고 오긴 했는데, 여기선 눈 씻고 찾아봐도 저희처럼 작은 유모차에 탄 아가가 없습니다. 다들, 유모차 바퀴가 흡사 Jeep 랭글러 수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네. 핀란드의 겨울은 눈보라 몰아치는 오프로드이니까요.

로바니에미 시내에 있는 아기용품 매장

아무리 유아용품이 싼 핀란드라지만 카시트와 유모차를 새 것으로 구입하기엔 저희로선 부담이 컸습니다. 중고용품 매장에 가도 카시트, 유모차는 찾기 어려운 품목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중고거래사이트(tori)에서 직접 직거래를 하는 시장이 꽤 크게 있었습니다. 핀란드어로 가득한 사이트를 마주하고 멍~ 하니 있기를 몇 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저희를 위해, 육아 선배이자 핀란드 선배인 루미네 가족이 무척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덕분에 지난 주말엔 카시트를 구매했구요. 저희 가족으로선 첫 차인 중고차도 샀습니다. 정착지수 +10이 증가했습니다.  

우리가족 첫 차를 타고 열심히 집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무튼 아직도 정착을 위해 해결해야 될 문제가 산적해있고 조금은 불편한 삶들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자도 자도 피곤하고 먹어도 먹어도 허기를 느낍니다. 예전에 돈을 벌때 처럼 예쁘게 꾸미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자주 사먹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간 이 시절을 그리워 할 날이 오겠지요?

아무리 과학적인 설명을 들었다해도 눈으로 보면 그저 신비롭기만한 지난 밤 오로라처럼 보아도 보아도 들어도 들어도 신기한 기적들을 이곳에서 또 경험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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