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장보고, 한국 밥상 차리기
"밥 먹었니?"
너무 뻔하고도 형식적일 수 있는 이 한 마디.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 자리에 복귀했을 때 동료에게 묻거나, 사랑하는 가족과 통화를 할 때 나누는 인삿말. 이 작고 가벼운 인사가 이 추운 핀란드에서는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각종 조미료와 약간의 식재료를 챙겨왔는데도 왜 이곳에서 만든 음식은 한국 같은 맛이 나지 않을까요? 제가 늘 애용하던 청양고추가 없어서 일까요. 가스불이 아닌 전기 인덕션을 사용해서 일까요. 뭐 아무튼 "외국 나오면 원래 배고파"라는 남편님 말씀처럼 이상하게 먹어도 먹어도 성에 안찹니다.
육아를 하다보니 아이와의 치열한 이유식 전투를 치루고 나면, 내 밥 챙겨먹기가 매우 귀찮아집니다. 그럴 땐 "아, 오늘은 밥 안하고 짜장면 시켜먹고 싶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마라도까지 짜장면 배달은 가능해도, 이 핀란드까지 이창명 아저씨가 올 턱이 없으니 울적해집니다. 피자 배달이 된다고는 들었는데 추가요금 4유로가 붙는다 하더군요. 배달도 잘 안되고 편의점도 곳곳마다 있지도 않은 나라에서는 길가다 배고파 쓰러질 것 같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튼 6화에서 밝힌대로 핀란드 가계부 쓰기를 시작한 후론 '그림 맞추기' 식으로 장을 보던 수준을 넘어 이제 꽤 고심하여 재료를 고르고 식탁을 차릴 줄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내 배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의 소리'가 아닌 '배의 소리'도 듣지요.
외국 여행갈 때 딱히 컵라면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게 여행이 아닌 진짜 장기체류(?)가 되니 삼십년 먹은 한국 짬밥을 안찾을래야 안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 한끼는 쌀밥을 먹고 있으니까요. 이곳은 평범한 평일이었던 지난 주, 한국에서 추석맞이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괜히 꼬치산적과 송편이 먹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혼자 추위를 뚫고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가지고 집에 와서 일을 벌였습니다.
아이의 초기이유식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쌀가루를 가져온 것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송편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익반죽을 하고 열심히 송편 반죽을 하려는데 양이 부족합니다. 거기에 아주 조금 남은 찹쌀가루를 반죽에 또 섞습니다. 근데 자꾸만 질퍽해집니다. 아, 그제야 알았습니다. 송편은 맵쌀가루로만 해야된다는 것을. 자, 그럼 가장 만들기 쉬운 경단으로 전향. 새알을 만들고 끓는 물에 담궈 익힌 후 꿀을 바르고 한국에서 가져온 깨를 굴려 깨경단을 만듭니다.
다음은 꼬치 산적 차례입니다. 마켓에 네모난 김밥햄 따위가 있을리 없죠. 소시지를 자릅니다. 네모난 단무지도 있을리 없죠. 오이피클을 길게 잘라 준비합니다. 그리고 노란색 빨강색 파프리카도 준비됐습니다. 그런데, 아차. 이번엔 이쑤시개가 없습니다.
약간 당황했지만 과일 포크를 이쑤시개 대용으로 이용해 재료들을 끼웁니다. 밀가루를 바르고 계란을 입힙니다. 포크 손잡이 부분이 녹을까봐 뒤집개로 살짝 든 채 기름을 두르고 꼬치를 익히기 시작합니다. 맛이 어땠냐고요? 경단은 맛이 없었지만 꼬치 산적은 꽤 먹을만 하더군요.
얼마전엔 난생처음 김치도 담갔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중인 친구네는 닭을 튀기고 양념치킨을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저는 이제 갓 입문 단계입니다. 장보러 나갔던 남편이 LIDL(리들)이라는 독일계 마트에서 한 포기에 1.8 유로에 세일하는 배추(Chinese cabbage라고 하더군요)를 사왔구요. 큰 다라이(?)가 없어서 싱크대를 깨끗하게 닦아 물을 담고 소금을 뿌리고 배추를 소금물에 4시간 정도 담가두었습니다.
배추를 물에 깨끗하게 씻고 난 후 쌀풀과 고춧가루, 피쉬소스(액젓 대신), 파, 양파, 마늘, 설탕 등을 넣고 김치양념을 만들었습니다. 근데 관건은 김칫속입니다. 여기는 한국처럼 아삭거리는 무가 없습니다. 생고구마 같이 딱딱한 무만 있죠. 그러던 중 저의 레이더망에 걸린 녀석이 있으니 바로 요 양배추 샐러드입니다.
식감이 흡사 무 생채를 강판에 가늘게 갈아둔 느낌인데다가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데 김칫속으로 적격입니다. 독일 소시지집에 가면 함께 곁들여 나오던 시큼한 양배추 샐러드 아시죠. 바로 그 녀석입니다. 간택된 이 녀석을 양념에 넣고 무칩니다. 그리고 배춧잎에 한겹 한겹 발라줍니다. 짜잔. 모두 4포기가 완성됐습니다. 남은 양념으로는 그 생고구마 같이 딱딱하다는 무를 잘라 넣고 석박지도 만들어 보았습니다.
김치를 직접 담가본 적은 없지만 양가에서 조달된 김치를 김치냉장고에 넣은 경험(?)은 많아, 하루 정도 밖에 둔 후에 냉장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꺼내보았더니 "아, 핀란드에 김치 체인 내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확인하시려면 비행기 타고 오세요.)
엊그제는 고기 코너에서 삼겹살을 발견했습니다. 핀란드어를 몰라도 삼겹살은 비주얼만 봐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삼겹살을 사랑하는 민족이 맞습니다.) 장을 봐온 다음날 아침부터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은데 고기를 굽기는 민망하여 커피가루를 조금 넣고 수육을 했습니다. 정말, 수육 맛이 납니다. 눈물이 납니다. (Tip. 이곳은 고기를 우리가 원하는대로 썰어주는 정육점 아저씨가 없습니다. 이미 잘린 고기를 산 후, 맘에 들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고기를 재단해야합니다.)
밥을 해먹을 땐, puuroriisi라고 써있는 이 쌀을 이용합니다. 1킬로에 1.8유로 선입니다. 압력밥솥이 아닌 전기밥솥으로 밥을 해먹어서인지 찰기도 없고 편의점 도시락 밥처럼 헛헛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이 밥으로 열심히 이유식을 해먹이고, 고추장에 비벼먹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왜인지 한국에서보다 핀란드에 와서 밥을 더 열심히 해먹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먹던 친숙한 밥 한끼가 그렇게 소중한지 몰랐습니다. 아, 오늘은 따뜻한 햅쌀밥에 달달한 한국 가을무가 들어간 소고기 무국이 먹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어쩌면 '밥'이란 집이고 가족이고 추억이고 미래고 시간이고 정체성이고 공동체이고 사랑이고 인생입니다.
참, 그래서들 식사는 하고 한주 시작 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