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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oooz Jul 17. 2020

나에게도 집이 생겼다.

인생 첫 집 이야기

30년 된 때때 묵은 집인데, 나는 이 집이 그렇게 사랑스럽다.


적당한 때에 해가 들어오다가 적당한 때에 해가 나가는, 빛이 들고나는 것까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집이다.


집은 작년 11월에 구했다. 결혼이 몇 개월 남지도 않았는데 여태 살 곳의 향방은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집 값이 1억씩 오른다는 때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갖 부동산 어플을 들락날락하고 서울 지도를 펼쳐서 내 몸 뉠 곳이 어딘지를 찾았다. 내가 그래도 10년 가깝게 일해서 모은 돈인데, 어디 갈 데 없겠냐 했지만 진짜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면서 들은 적은 많아도 입 밖으로 뱉은 적도 없는 '헬조선' 소리를 이때 처음 했다.


그러다가 손이 시릴랑 말랑하던 11월에 그동안 봐 두었던 지역으로 구경 삼아 나섰다. 서울에서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집-학교, 집-회사, 그리고 그 주변 언저리나 왔다리갔다리 했지 모르는 곳이 천지라는 걸 알았다.


난생처음 와본 동네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부동산에 들어갔다. 아파트 가격이 미친 용트림을 해댈 때니 부동산에는 이미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뜨내기처럼 보였는지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부동산 사장님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마침 비어 있는 집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서울에 하나 남은, 저렴한 아파트"라는 부동산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면서 보기로 한 집으로 걸어가는데 아파트 안에 의외로 놀이터도 많고 거기서 노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집을 하나 보고, 가격이 맞지 않아 망설이는 폼을 보더니 사장님이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비슷한 집이 하나 더 있다며 데려갔다.


들어가기 전부터 "이 집은 진짜 구조만, 느낌만 보는 집"이라고 속사포로 한 6, 7번을 강조했는데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해버렸다.


현관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이미 30년 전으로 들어와 있는 착각에 빠졌다. 노란 벽지와 장판, 나무 장롱은 90년 그 시절의 완벽한 빈티지였다. 5남매를 키우신 할머니가 오래 사신 집이라, 집은 한 번도 수리를 못했다고, 느낌만 보라고, 끊이지 않고 부연 설명하는 부동산 사장님의 말과 상관없이 나는 이미 집에 마음을 뺏겼다. 


오후인데도 해가 집 안쪽 깊숙이 들어왔고 베란다 앞쪽으로 막힌 건물이 없었다. 집 바로 아래 길로 마을버스가 다니고, 작지만 마트며 채소가게도 있고 동네 사랑방 같은 치킨집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나무가 많았다. 출퇴근을 위한 지하철역이 좀 먼가 싶었지만 부동산 사장님이랑 걸어보니 이 정도는 걷는 것 축에도 못 끼는, 아주 적절한 거리였다. 오래된 아파트 특유의 고즈넉함이 좋았고, 지금은 빈 가지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잎이 풍성할 나무들이 가득했다. 처음 온 동네지만 어쩐지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내 몸 뉘일 곳을 마련했다.

겨울 코트라도 사는 것 마냥 간단한 집 마련에 멍해버렸지만 일단은 모든 게 잘 해결되었다.


His comment

나도 다 좋았어. 네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안심했지. 나는 최소 5곳 이상은 돌아다닐 각오였는데 처음 본 곳에서 해결하게 되어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지. 와씨, 다행이다 싶었다니까. 나 진짜 서울에서 운전하는 거 적응 안 돼. 아 그게 아니고... 집 봤을 때 너랑 둘이 살기에 적당한 넓이였고 많이 낡긴 했어도 수리하면 그럴듯하겠다 싶더라. 어쨌든 한방에 결정해 줘서 고맙다. 땡큐.

이 동네에도 솜방망이를 가진 고양이가 있다.
이사 후 첫 여름을 풍요로운 초록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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