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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 Jan 20. 2021

지갑이 없는 시대를 깨달아버렸습니다

충동적 디지털 디톡스로 시작해 금융의 시대적 변화를 몸소 깨달은 이야기

가끔 살다 보면 각종 미디어에서는 어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또는 트렌드를 거창하게 다루는데 정작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감각한 경우가 있다. 가령, OTT 콘텐츠가 세상을 휩쓸 것이라는 얘기는 이제 너무 당연하게 되어 글쓰기에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 외에도 음성 인식이니 얼굴 인식이니 하는 많은 것이 있지만, 이제는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처럼 들린다. 물론 하도 많이 세간에 회자되어 너무 익숙해졌거나,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번 글의 주제는 그런 것이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과 그것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는 것의 맥락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경험이다. 글쓰기 주제로 가져오기조차 민망한 '지갑 없는 시대'를 2021년에 깨달은 이야기, 지금부터 회고하고자 한다.


핸드폰 없는 하루를 결심하다


아마 최근 5년 이내에 핸드폰을 놓고 어디론가 외출해본 적이 있냐고 하면, 아마도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우리 집은 산에 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내리막길을 10분 이상을 걸어야 하기에, 가끔은 출근시간이 비슷하면 아빠의 차를 타고 함께 내려오고는 한다. 마침 그날은 시간이 맞는 날이었고, 그렇게 시트에 깔린 엉뜨가 따뜻해질 무렵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내 핸드폰 어디 갔지?'


다시 되돌아가면 10분, 또 내려오는 시간 10분. 직장에 최소 30분~한 시간 반 전에는 도착하는 습관이 있어 되돌아간다 해도 지각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나의 출근 시간 산정 방식에는 이러한 돌발상황에 대비할 시간도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그러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정도 핸드폰이 없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충동적이었으며 완벽한 디지털 디톡스는 아니었지만, 호기심도 생겼고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결정에는 PC카톡이라는 보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해요 카카오톡


현금과 결제 수단이 모두 없다는 것을 깨닫다


어차피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은 카카오톡으로 진행하고, 아직 햇병아리도 모자라 유정란 수준인 나에게 클라이언트나 다른 팀과 직접적으로 통화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전화는 쓸 일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직장인인데, 핸드폰이 없어도 되나?' '혹시 누가 전화라도 하면 어떡하지?' '내가 전화할 일은 없나?' 약간은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제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이 흐르자 우려한 일은 발생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오히려 이쯤 되니 '이어폰도 무용지물이고 집에 갈 때 지하철에서 뭐 보지?' 같은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이 생각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를 통해 쿠팡 이츠로 주문을 한다. 평소 핸드폰이 없는 상황이라면 대면 결제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쿠팡 이츠는 대면 결제를 지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주문자에게 줘야 할 금액이 카카오톡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런 돈이 오가는 문제는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시간이 딜레이 되는 것이 싫어 지갑을 꺼냈는데, 현금이 없다.


지갑 없는 시대에 적응해야 할 이유를 몸소 깨닫다


빈 지갑과 그 지갑을 채운 신용카드. 지갑에 남의 돈도 일단은 내 돈처럼 쓸 수 있는 신용카드가 두 장이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상대방한테 돈을 줄 수가 없다. 잠깐의 뇌 정지가 온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OO 씨, 제가 오늘 핸드폰을 안 갖고 와서, 돈은 내일 드려도 괜찮을까요?"


별생각 없이 당연하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 흠칫하는 구간이 있다. '돈을 안 갖고 와서'가 아니라, '핸드폰을 안 갖고 와서'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하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 원래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건가? 언제부터 내게 있어 돈이라는 단어가 핸드폰으로 대체되었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는 것은 내가 평소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나, 환경에 자주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의아했다. 평소에 지갑 없는 시대를 생각하지도 않았고, 편의점이나 쇼핑몰에서 물건을 살 때 삼성 페이도 쓰지 않아 지갑과 카드는 내게는 필수품이다. 뭐 이런 걸로 글까지 쓰나 생각이 들게 하는 이 의아함의 근원을 찾기 위한 장고 끝에, '핸드폰 없이는 돈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할 수 있다'는 상황을 처음으로 느꼈기 때문에, 전례 없던 경험으로 인한 일종의 충격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화폐 지불 수단의 개념으로 본다면 핸드폰과 카드는 별 차이가 없다. 카드가 없으면 아무리 통장에 잔고가 많아도 돈이 무의미해지는 건 같으니까. 하지만 '카드-돈'과, '핸드폰-돈'의 관점에서 본다면 카드가 없어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은 자주 있어왔지만, 핸드폰이 없어 돈을 주지 못하는 상황은 내게 있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비로소 지갑 없는 시대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이윽고 집에 도착해 미처 전달하지 못한 점심 값을 송금하자 그토록 익숙하면서도, 이토록 새로운 문구와 함께 길었던 하루가 끝난다.


'10,000원을 받으세요.'
-카카오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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