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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달걀 Jun 22. 2016

글을 쓴다는 것

야밤에 '아점'을 먹기 시작하며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쭉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아니, 기억 너머에서부터.


어머니의 증언과 아직까지 간직된 몇 가지 증거품 - 뜯어진 스케치북과 빛바랜 사진들 - 에 의하면 나는 네 살 때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중 작곡 능력은 미처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증발해 버린 듯 한데, 작사, 그러니까 무언가를 써 내는 능력만큼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쓰는 능력 혹은 버릇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해, 이런저런 기억과 추억을 남겨 주었다.


초등학교 때는 집 앞의 글짓기 학원을 놀이터 삼아 다녔다. 시인 부부 선생님이 운영하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뭘 '배운' 기억은 원고지 쓰는 법 정도이고 그 외에는 그저 이것저것 쓰고 싶은 걸 썼던 기억들이다(학원비는 내면서 다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궁금하지만 부모님이 내셨겠지 아마..). 빨강 선이 그어진 200자 원고지에 무언가를 또박또박 채워넣는 것은 내게 즐거운 놀이였다. 지독한 책벌레에 공상과 망상이 특기인 어린이였던 탓에 일말의 시적 창의력이 있었던 것일까, 시인 선생님들께 무척 예쁨을 받았던 기억도 살짝 스친다.

중학교 때는 중2병이 넘쳐흐르는 비밀 일기장에 작문 투혼을 쏟아냈다. 표지와 속표지에 '펼쳐보지 마시오', '경고', '(나)외 접근금지' 따위를 눌러쓴 열쇠가 달린 일기장 안에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짝사랑의 고통, 세상에 대한 '나름대로' 심도있는 분석 혹은 냉소, 학업과 교우관계에 대한 고민 따위가 봉인된 흑염룡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10년 후의 나를 소름돋게 만든다. 어쨌든 그 또한 어엿한 글쓰기임에는 틀림없다.

대입 수험생이 되어 한동안 글쓰기를 멀리하던 나에게, 명문대학에서 그 입상경력을 가산점으로 인정해 준다는 유수의 청소년 문예 대회 포스터가 보인 것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알 수 없다.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가산점에 눈이 멀어 젖먹던 힘, 아니 어린 시절 원고지 칸 채우던 힘까지 짜내어 한 달만에 시 네 편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의도는 불순해도 오랜만에 느끼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퇴고의 고통, 그리고 그 타는 가슴에 시원한 냉수처럼 부어지는 창작의 기쁨은 순수하게 반가웠다. 게다가 그 급성 문학청소년 코스프레는 얼토당토않게도 예선을 통과하여, 비록 수상까지는 못 했어도(즉, 가산점은 실패였다) 본선 합숙 참여라는 재미난 - 그것도 고3 시절에 - 추억을 얻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또 다른 보람은 있었던 게다.

스무 살 넘어서는 블로그니, 커뮤니티 사이트니, SNS니 하는 온갖 사이버 공간에 뭔가를 써넣곤 했다. 일기, 여행기, 때로는 짧은 수필. 작은 것에도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나를 둘러싼 사람과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 때문에 상처 받고 힘들어하기 일쑤였던 이십 대 초반에, 대나무숲에 소리치듯 풀어놓는 그 글쓰기들은 창작이라기보다는 스트레스 해소 겸 자가치유 프로젝트에 다름아니었다.

그리고 어느덧 월급쟁이 사회인이 되어 버린 나.


SNS에 가끔 올리는 단문들을 빼면 글을 쓰지 않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 바빠서 오래 된지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가끔씩 느낀다. 마음 속에 뭔가가 뿌듯이 차올라 터질 것 같은 답답함. 동시에, 이렇게 오래 아무것도 쓰지 않고서야 글 쓰는 방법을 잊고 말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게 내게 너무나 두려운 생각이라는 사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다시 한 번 실감한 것이다.


뭔가를 쓴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한 방식이다.



사금을 건지듯 조심스레 단어를 고르며 넓은 사고의 지평을 탐험하고, 조각하듯 문장을 깎고 붙이고 다듬으며 나 자신을 함께 정돈한다. 바람에 쉬 날아갈 작은 순간을 붙들어 매어 의미를 찾아 주고, 어설픈 생각 꼬리를 스스로 쓰고 읽으며 조금 더 영글게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내게, 그런 멋진 일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 동시에, 나를 그 세계에 존재케 하며, 나아가 내가 발딛은 진짜 세계에 작은 인사를 건네는 방법이기도 한.


휴일 늦은 아침 잠에서 깨 '아점'을 먹는 순간처럼 소박한 여유를, 이제 이곳 브런치에 담아 볼까 한다.

글 쓰는 법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아무거나, 아무때나, 되는대로, 즐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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