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회식인걸 깜박했던 것이다.
오늘은 나의 첫 108배 체험기. 아니.. 숙취 속 첫 108배 체험기이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핼러윈, 크리스마스, 몇 주년 파티 등등 파티 겸 특별수업을 한다. 특별수업에는 선생님의 동료, 요가 수련생의 친구 등등 평소 요가원에서 뵐 수 없는 다양한 분들이 (놀러)수련하러 오신다. 지난 크리스마스 특별 수업엔 옆동네 지축에 요가원을 개원하신 라야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12월 31일 토요일에 108배 수업을 진행하신다고 했다. 108배는 말로만 들었지 다 함께 날을 잡고 하는 수업이 있는지는 몰랐네. 회사 친구를 꼬셔 수업을 신청했다.
그런데 깜박했다.
우리 회사 송년 회식은 12월 30일이라는 것을.
회사 동료인 우리는 전날 새벽 2시까지 달렸다. 집에 들어가면서 우리 내일 10시에 아파트 앞에서 만날까? 라며 웃으면서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요가복이 잘 안 들어갔다. 몸이 아마도 팅팅 부었나 보다. 가기 너무나 귀찮지만 시간관념이 철저한 J는 우리 아파트 앞에 시간 맞춰 나와있을 것이고 나는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이러려고 친구를 꼬셨나 보다. 그녀는 역시나 아파트 정문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J야.. 나 아직 취한거같애... 라고말해볼까? 가는 내내 차를 돌릴까 말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꼬셔서 조수석에 앉아있는 J에겐 돌아가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근데 그녀도 나랑 비슷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화기애애했던 어젯밤이 무색하게 아무 말 없이 센 척하면서 30분을 달렸다.
새로 건물들이 올라온 신도시에 도착해 텅텅 빈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오늘은 홀리데이니까 아침부터 운동하러 오는 사람은 없으신가 보다. 속이 안 좋다는 J에게 나는 해장 커피를 마시면 괜찮을 거라 했지만 그녀는 거절. 난 1층 스타벅스에서 해장 커피를 마시고 J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J는 현명했다)
요가원에 도착하니 이미 두 분이 계셨다. 요가원은 과연 새 요가원답게 깨끗. 핸드타월을 착착, 매트도 착착. 다과와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자리를 잡으려는데 해장술이 해독이 됐는지 소화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혹시 속이 뒤집힐까 싶어서 우리 둘은 맨 뒷열에 자리를 잡았다. 만약 멀쩡했으면 맘에 드는 핸드타월 색 매트를 골랐을 것이다.(핸드타월은 선물이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몸을 풀었다. 천만다행으로 속이 잘 가라앉았다.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나무색종이 위에 22년의 감사, 다른 면에는 23년‘의도’를 적었다. 22년은 결과를 적고 23년은 희망, 소망이 아닌 의지, 의도를 적는다는 점이 묘하게 느껴졌다. 지난날은 감사히 받아들이고 새 날은 의지에 따라 열심히 살아보자는 것일까.
22년과 23년을 적은 종이를 매트아래 깔아 두고
수리야 나마스카르를 시작했다.
108번의 수리야나마스카르를 잘 이어가는 포인트는 들숨 날숨에 동작을 싣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지난달에 읽은 습관 책에서 말하길, 습관을 만드는 데는 ‘당위성’, ‘필요성’ 같은 의지보다는 생각 없이 일단 하는 쪽이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나는 숨은 짧고 동작은 자꾸 깊게 하는 편이라 갑자기 특정 동작에 의미부여를 하게 돼서 혼자 하는 구간에선 속도가 들쭉날쭉했다. 선생님은 동작 하나하나를 신경쓰며 하는 것 보다 숨에 맞춰 자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확실히 숨에 집중하면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카운트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리드를 해주셔서 숫자를 세지 않아 잡생각도 안 들었고, 페이스를 맞추기가 좋았다. 숨이 빠르거나 느린 사람도 견상자세(down dog)이나 선자세(Tadasana)에서 중간중간 걸음을 맞춰가며 달렸다. 수련실의 모두는 가장 빠른 사람과 가장 느린 사람의 평균 속도로 함께 완주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매트아래 깔아 두었던 각자의 종이를 잘 접어서 지갑 등에 넣고 힘들 때마다 보라고 하셨다.
수련 후에 시간이 되는 분들은 모여서 귤과 과자, 보이차를 앞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서울 북촌 요가원에서 수업을 듣다가 이 수업을 알게 되어 분당에서 오셨다는 분도 계셨고, 우리 요가원에서 오신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이 자리를 위해 선생님은 귀여운 바구니와 다과상을 구입하셨다고 했다. 늦게 오신 분 말에 따르면 주차장은 건물 밖까지 차가 가득했다고 한다. 역시 수련오는게 나만 귀찮았나 싶었고, 이렇게 모두가 열정적인데 수업을 빠지는 것은 큰 민폐라고 느꼈다. (나는야 노쇼근절운동본부)
J와 나는 다과로는 해장이 부족했다. 대화역에서 제일 잘하는 곰탕집에 갔다. 와 우리 이걸 완주했네 하며 씩씩하게 한 그릇 먹는데 그녀는 숟가락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나는 후식 커피를 마시자마자 몸이 녹아서 눈이 자꾸 감겼다.
'23년 의도'를 적은 종이는 휴대폰에 사진으로 찍어서 잘 간직하게 되었다. 12월 31일 무종교인의 송구영신 리추얼은 이렇게 끝났고, 내년에 과연 또 할지는... 모르겠지만 23년 의도적은 종이는 꼭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하게 되면 그때는 꼭 말짱한 정신으로 108배를 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