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문학과지성사)를 읽고
사랑은 언젠가부터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다가온 문장이 있다.
"현명한 사람도 미욱한 사랑으로 자신의 거짓 영리함과 마주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랑은 어차피 이상하고 적나라하게 자기 함정에 빠지는 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함정을 미담으로 치환해가는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남을 때, 비로소 사랑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뭐야.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야. 누구의 책인 거야. 뭐 이렇게 읽고 싶게 만드는 거야. 그는 김소연 작가였다. 김소연 작가는 사랑인 줄 알았던 미완의 사랑 때문에 상처를 주었던 찰나의 사람이 좋아하던 작가이기도 했다. 결국 이 책을 구입했고 틈틈이 읽어 내려갔다. 어떤 날은 글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어떤 날은 심연에 다녀오기도 했고, 사랑이 필요했던 어떤 날엔 홀린 듯이 줄을 그어가며 책 속의 글과 손을 잡았다.
사랑이 뭔지 궁금해 정확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에 들었던 나. 사람들을 인터뷰할 땐 마지막에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던 나.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이에 사랑 없음을 발견하고는 사랑의 조각들을 주워오던 나. 사랑의 불가해함을 느끼고 사랑의 실패를 다루는 소설들을 읽던 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이 되었다가 저 사람이 되었다가 하던 나. 그런 모든 순간의 나를 이 글들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재발견.
책을 다 읽고는 사랑을 온전함의 영역에 두지 않기로 했다. 완벽한 사랑은 거기 그대로만 있어줘가 아니라, 내가 믿어왔던 사랑을 허물고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다시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은 역시나 완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불완전하고 옹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지독하게 마주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사랑을 두고 입을 어렵게, 귀를 예민하게 다룰 수 있을까.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판단의 굴레로부터 멀어져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앞으로는 글을 더 많이 읽고 쓰는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래야만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고 꼿꼿하게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으리라. 글을 쓰며 무언가를 기꺼이 겪으려 하고, 믿음으로 믿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러려면 모든 걸 제대로 곱씹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의지를 가지고 더 느리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불안을 연료로 삼아 사랑의 온갖 모습을 진지하게 경험하고 사유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김소연 작가가 이 책을 쓰며 페소아를 사랑했듯이, 나는 김소연 작가를 사랑하며 읽었다. 사랑을 지독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글로부터 발산되어 나의 마음으로 스며들어왔다. 용기는 대체로 내게 그런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사랑과 참으로 닮아있다. 김소연 작가처럼, 또 사랑을 직면하는 염결하고 슴슴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쩌면 지금이 모든 지혜를 동원해 사랑에 대해 감각해야 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사랑을 만져보고 들어 보고 느껴보는 시기에 이 책을 마주한 행운에 감사한다.
155p.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곁에 두되, 다른 노선은 정녕 없는 걸까.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을 연료로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서로 보태기 위한 두 사람. 거대하고 획일화된 악습들의 연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관성을 멈추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두 사람. 시스템의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내적 질서와 부합되는 새롭고 자그마한 시스템을 함께 모색하는 두 사람. 목표를 향해서 헛둘헛둘 뛰어가는 게 아니라, 목표를 지워버린 채로 출렁이는 불안의 요동에 리듬을 맞춰 그렇게 하면 좋겠다. 시스템 속으로 진출하는 일과 안정적인 입지를 욕망하는 일과 그럼으로써 더 큰 불안의 수렁 속을 헤매는 일을 그만두는 일.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입성하여 불안의 출렁임을 함께 즐길 용기를 내어주는 일. 경력보다는 경험을, 사화적 입지보다는 세계에 대한 태도를, 안정보다는 표류를 함께 도모하는 일. 삶에 관하여 영원히 딜레탕트로 남는 일. 불안에 관하여 가장 전문적이고 능란해지는 일. 이런 일을 함께할 사람을 곁에 두는 생을 그녀는 사랑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180p. 그의 시는 대단한 결기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냉소나 환멸로 손쉽게 치환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하지 않으냐 눙치려 들지도 않는다. 낙담의 자리에서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힘을 모"으는, 은은하고도 든든한 모습으로 그는 서 있다.
219p. 열정이 배제된, 고도로 다듬어진 삶을 살기. 이상의 전원에서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며, 그리고 글쓰기를 생각하며. 권태에 근접할 정도로, 그토록 느린 삶. 하지만 정말로 권태로워지지는 않도록 충분히 숙고된 삶. (중략) 삶에서 더 이상의 소망은 없다. 미지의 바람이 불어오면 오후의 대기 속으로 소리 없이 날리고, 고요한 저녁 빛 속 어느 우연한 장소로 내려앉는다. 더욱 위대한 사물들 사이에서 자신을 망각한다. 이 모두를 확실하게 인식하면서,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햇살이 주는 태양에게 감사하고, 아득함을 가르쳐주는 별들에게 감사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소유하지 않고,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굶주린 자의 음악, 눈먼 자의 노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방랑자의 기억, 사막을 가는 낙타의 발자국, 그 어떤 짐도 목적지도 없이.
223p.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