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간과하면 바이러스는 계속될 것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5월 11일 기준으로 사망자만 해도 28만 명이 넘었고,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 의료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렸으며, 소상공인들이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학교는 온라인 개학을 치르게 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제 위치에서 물리적 거리두기를 비롯한 각각의 방역에 힘쓰고 있고, 코로나 19 이전의 일상을 그리워한다. 전문가들은 완전한 치료제가 생기기 전까지 코로나 이전의 일상은 없을 것이라 경고한다.
우리가 이토록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에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코로나 19는 사람을 바이러스에 감염되게 하여 심각한 경우 죽게 만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감염’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감염의 사전적 정의는 ‘병원성 미생물이 사람이나 동물, 체액, 표면 등에 정착해 증식하는 일’을 말하는데, 이 미생물이 인체에 감염하더라도 발병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인간은 수많은 체내 미생물들과 공생하고 있다.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유래한 그 미생물들을 이질적인 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일부로 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몸속에 있는 미생물 미토콘드리아가 그렇다. 하지만 이 미생물이 발병을 일으키면 얘기가 달라진다. 코로나 19는 발병하는 ‘현성 감염’의 한 종류이며 전염성을 띄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험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염을 겪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드니까.
우리는 아픈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드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아프고 죽는 것을 싫어하니까 타인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죽게 만드는 존재들을 미워한다. 그것들을 나쁜 것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나타난 코로나 19는 일상을 침해하는 악당인 것만 같다. 여기서 질문이 필요하다. 아픈 것을 싫어하는 우리들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아프게 하고 있을까?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악당이듯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의 악당으로 살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자들은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중국 우한의 육류시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도살되고 끔찍한 모습을 한 채 사람들에 의해 거래된다. 소, 닭, 돼지는 기본이고 박쥐, 천산갑 등 온갖 동물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야만적인 곳. 단지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서, 몸보신을 하기 위해서, 동물을 먹으면 복이 굴러들어온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들로. 이번 코로나 19 역시 박쥐를 매개로 하여 병원성 미생물이 인간에게 감염되며 팬데믹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 보고 있다. 코로나 19의 감염경로가 박쥐 몸속에 있던 미생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인 감염원을 박쥐라 말하지만, 실은 우리가 박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감염과 병을 일으키는 것을 인수공통 바이러스 전염병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염병은 점점 더 빨리, 더 큰 규모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1976년의 에볼라 바이러스, 2002년의 SARS,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A, 2012년도의 메르스까지도. 이 인수공통 전염병들의 발생 경로를 조사해보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인간의 동물 착취와 육식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동물 몸속의 바이러스가 사람 몸에서 변이를 일으킬 수 있던 환경은 우리가 닭, 돼지, 낙타 등의 영역을 필요 이상으로 침범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들을 먹기 위해 좁은 우리 안에 그들을 가두고, 그들을 키우기 위해 산림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의 터전을 빼앗고, 각종 호르몬을 투여하며 그들을 인간에게 먹여지기 위한 존재로 길러냈으니까. 실제로 지난 30년간 발생한 역병의 약 75%는 인수공통 바이러스 전염병에서 유래했으며, 광우병이 초식동물인 소에게 소를 강제로 먹여 발생했음을 따져보면 육식의 결과가 동물에게도 심지어 우리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치명적인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중국의 육류시장을 비난한다고, 중국인들을 혐오한다고, 도살자들과 축산 시장을 욕한다고 과연 이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바이러스들은 공장식 축산이 일어나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으며, 공장식 축산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수요가 줄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인데도. 동물도 동물을 먹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물 착취를 정당화할 때는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다 야만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땐 우리도 동물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를 따지는 우리 스스로를 모순에 빠지게 하는 일이다.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말하는 우리들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존재들의 자유를 막고 심지어 끔찍하게 죽이기까지 하는지. 우리는 우리 거울 속의 악당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IoBAS6bLy8
'악당'이라는 단어 선택은 사실 만족스럽지 않다.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느끼고 생존 본능이 있는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행위에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윤리적 기만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커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저항 정신과 조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당이란 단어를 고른 것은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믿기 위해서다. 나는 우리를 악으로만 규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분명 사람다운 흔적들이 있다. 나는 그 ‘사람답다’라는 말이 지구와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들에게 잔인하고 끔찍한 것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따스함이 있다.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발코니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마스크를 기증하는 사람들, 좀 더 밝은 세상을 위해 코로나 전선에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보며 어떤 울림을 느낀다. 그런 울림으로부터 책임감이 밀려들어온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전염’이 아닌가 싶다. 연결된 마음.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타인을 위하는 마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온기 같은 것들. 그렇기에 간곡하게 호소한다. 나도 당신도 많이 부족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동물들 입장에서 끔찍한 악당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를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우리가 우리의 반려견을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물론 진지한 호소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 글을 읽고 채식에 대해 잠시나마 고민을 해볼지언정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친구들과 좋은 날을 기념하며 삼겹살 파티를 하고, 한강에서 치맥을 먹자 죄책 감 없이 말하고, 눈 앞의 고기와 동물을 같은 대상으로 느끼지 못하는 끊어진 삶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에 개인에게는 비거니즘 콘텐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을 만들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것, 정부 차원에서는 환경과 복지를 고려해 고기에 대한 수요를 낮추는 실질적 법을 제정하는 것 등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SNS에서 채식 라이프와 관련된 계정들을 팔로우하고, 하루 한 끼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채식을 해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해 현재는 비건 지향하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이런 삶의 좋은 점을 보여주며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비건 라이프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비건은 절대적이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강아지와 소를 반려동물과 식용동물로 구분 짓는 종차별 개념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해보고, 고기 사진을 SNS에 게시하지 않고, 육식을 장려하는 동물 축제를 가지 않고, 하루 한 끼라도 채식을 해보고, 비건 식당을 방문해보는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에서 출발하면 된다. 그리고 항상 명심해두자. 지금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다른 동물들은 친구의 피가 뚝뚝 묻은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코로나 19 이후로 그런 사진들을 봤다. 사람들이 없어진 거리에서 벚꽃을 즐기는 청설모들, 파리의 거리에 나타나 산책을 즐기는 사슴들. 항상 가려져 있다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맥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람들이 아픈 것이 싫어 코로나 19를 두려워하듯이, 자연과 동물들도 아픈 것이 싫어 인간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을. 아름다운 자연을 해치고 있는 우리들이 그들에게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무뎌졌다. 수없이 많은 고통을 양산해냈다. 코로나 19 이후 하루하루를 지켜보며,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일상에서도 많은 순간 죄책감이 몰려온다.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하지만 나의 에너지를 후회하고 포기하고 정부를 탓하고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을 비난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데 사용하고 싶진 않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겸손하게 도움이 되는 일을 지속하고 싶다. 바이러스 발생 후의 예방과 치료도 중요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근본적 원인을 기억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비건을 지향하는 삶과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비건의 목적은 지구와 동물들에게 끼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더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건은 동물과 자연을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건강함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된다. 나는 비건을 지향한 뒤 음식을 더 잘 소화하고, 보다 가벼운 몸을 가지게 되었고, 고통을 최소화한 식탁의 소중함을 배웠고, 나를 제외한 다른 것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아가며 초록빛 삶을 조금씩 감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몸이 더 이상 동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초록빛 정원일 수 있도록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씩 실천해보는 건 어떠할까? 초록으로 물든 세상에서 바이러스 걱정 없이 뛰어노는 우리 모두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