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모르게 붕 떠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현실 도피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되려 붕 떠있는 이야기들이 우리가 발 닿고 있는 현실을 더 잘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소설이 가지는 힘, 그중에서도 SF 소설이 가지는 힘은 무엇일까? 문학과 지성사 SF엔솔러지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를 읽고 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확실해진다. 여섯 명의 작가 각각의 개성과 상상력으로 빚어놓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나면 우리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감각하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좀 더 확장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단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조금 보태어보자면 우선 김초엽 작가의 [최후의 라이오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 유일한 유기물로 세상에 남겨진 주인공은 유기체의 존재 조건이 다른 생물의 죽음으로부터 연명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죽음은 다른 삶을 지탱하는 것이다.'라는 문장 속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며 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죽어온 수많은 연결된 존재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동시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죽음의 두려움을 아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셀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다독여줄 수 있었다.' 이 문장이 정말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또 다른 존재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줄 수 있다는 사실. 디스토피아 속에서도 자신을 탐구하고 존재 가치를 꿋꿋하게 발견해나가는 라이오니의 모습을 그려보니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 소설이었다.
두 번째로 정말 킥킥거리며 재밌게 읽었던 단편은 배명훈 작가의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차카타파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를 시작으로 소설 도입부에서 수많은 오타를 발견하고 오타 신고를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작가가 설정한 SF적 설정이었다는 사실에서 쾌감이 느껴졌다. 2020년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점점 비말을 튀기는 파열음이 없어졌다는 설정. 감염병의 흔적은 생활양식이 되어 전해지고 후세대에는 파열음이 없어진 언어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습관과 문화 양식처럼 남아있다는 설정 자체가 가장 즐거웠던 단편이다. 후세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슬모없는21세기인들'이라고부르고 2020년을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라 지칭하는 소설 속 역사학자의 모습을 보며 지금의 우리 모습을 자연스레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다르시스를 느겼다"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로 발화되는 순간 정말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언어유희가 제대로 발휘된 재치 있는 소설이었다.
다음으로는 단편들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소설이 있었다. 바로 이종산 작가의 [벌레 폭풍]. 스크린 윈도우가 보편적으로 유명해진 미래 세대에서 자본주의의 흐름은 여전히 적용되고, 접촉 혐오가 있는 세대인 포포와 살을 맞대는 것이 사랑에 가깝다 믿는 포포 언니와의 관계 설정이 흥미로웠다.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호르몬 조절 기구와 벌레 폭풍이 판을 치는 다양한 설정이 짧은 이야기 속에 과하지 않게 잘 버무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서울 법해지면 금세 괜찮아하고 따뜻해지는 미래 동화를 읽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 더 드라마틱한 갈등이나 사건들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동시에 포포라는 인물에 이입하다 보면 안전한 소설 속 세상이 지켜지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외에도 인류와 바이러스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쓰는 즐거움과 열린 결말로 보여주는 듀나 작가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모든 것이 실재인지 상상인지 거리를 두고 대리만족하게 되는 재난영화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며 각 단편의 등장하는 상자가 하나의 소설로 연결될 운명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정소연 작가의 [미정의 상자], 김이환 작가의 [그 상자]까지 흥미로운 6개의 이야기들이 멋진 표지 속에 압축적으로 잘 담겨 있다.
마지막 소설 [벌레 폭풍]에는 그런 문장이 나온다. '때로는 바깥과 자신의 연결을 끊고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막막한 외로움에서 헤어날 수 있게.' 공감 가는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언택트 시대에서 자의든 타의든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은 실제로 막막한 외로움을 헤어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연결이라는 것은 실제로 물리적 접촉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나의 내면을 탐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있던 세상을 새롭게 감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타인을 경험함으로써 더 넓고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기후위기가 심각하고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점점 현실이 될 것만 같은 불안 속에 사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이야기들을 만나 즐거웠다.
(이 글은 문학과 지성사 팬데믹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솔직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