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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훈 Nov 26. 2020

[수플레] 나의 평안이 너에게 닿았으면 해서.

ep.39 Hiroshi Yoshimura - Green

 요 며칠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친구가 태어난 지 만일이 되어서, 멋진 졸업 전시를 준비하느라 고생한 친구를 위해서, 혹은 그냥 편지가 주는 안온함을 느끼고 싶어서.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진심을 써 내려가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은 항상 짧은 고민을 한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해. 돌이켜보면 그런 말들을 편지 끝에 자주 썼던 것 같다.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언어들이라 믿으며. 나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안부 인사를 받거나 상대방과의 대화 끝에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건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는 메신저에서도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습관적으로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 하나다. 어릴 때부터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온 언어이기도 하고. 그렇게 습관적으로 상대방의 건강을 빌던 내가, 건강한 삶을 강조하던 내가 최근 그 말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에서 김하나 작가님의 글을 본 이후부터다. 그 글에서는 말한다.


흔히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상대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처럼 건강 지상주의로 흐르는 말들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을 하고 즐거움을 느끼고 노력하고 성취도 이루는데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라는 말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송두리째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표현이다.
(중략)
나는 현대인의 지성이란 스스로의 말이 여성, 약자, 소수자, 장애인 들을 소외시키지는 않는지 점검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지구의 모든 생명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더 나은 표현을 고를 수 있는 능력도. (출처: <말하기를 말하기>, 김하나, 2020, 콜라주)


글에 공감했고 그 단어를 지양할 필요성을 느꼈다. '~답다'라는 말 사용하지 않기, 출산율에서 출생률로, 유모차에서 유아차로 바꿔 말하기, 박제라는 단어를 유머로 소비하지 않기, 병맛이라는 말 안 쓰기, '나이에 비해~', '~해 죽겠다' 와 같은 언어 지양하기 등등. 나의 언어는 그렇게 차츰차츰 업데이트를 거쳐왔지만, 그간 건강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잘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럼 앞으로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자연스레 고민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건강할 수만은 없다. 내 친구는 회사 동료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로 한동안 안 눌리던 가위에 다시 눌린다 그랬고, 나 역시도 최근 병원과 약에 의지하던 때가 있었으며, 밖으로 내뱉지 못한 무언가 들이 마음 가득히 쌓였다 예고도 없이 터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종종 일어날 법한 일이다. 항상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항상 행복한 삶처럼 허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신체적 정신적 아픔을 지워버리지 않고 아픔을 짊어지면서도 당신이 무사히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할 언어는 무엇일까? 나는 고민 끝에 '평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평안을 사전 검색해보면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이라고 한다. 언제라도 다칠 수 있고 언제라도 다치게 만들 수 있는 사회에서 잠시나마 당신이 걱정 없이 무사히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일 테니.

평안이라는 단어에 집중하니 사람들은 언제 평안을 느끼는지 궁금해졌다. 나의 경우는 하루 끝에 샤워를 마치고 인센스를 태우며 차를 마실 때, 가사 없는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고 몸을 이완시킨 뒤 잠자리에 들 때 가장 평안함을 느낀다.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차를 대접하는 것도 내가 느끼는 평안함을 친구도 느꼈으면 하기 때문이다. 아픈 친구에게 너의 아픔을 잘 안다고 쉽게 뱉는 말은 때때로 친구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분해되며, 친구의 상황을 낙관하거나 행동을 칭찬하는 것 역시도 결국엔 평가가 될 수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나의 평온함을 조금이나마 내어주는 것지 않을까 하면서.


https://www.youtube.com/watch?v=D7aYjRl_6Zw&feature=emb_title


오늘의 수플레에서는(글이 늦어 목플레가 되었지만..ㅎ) 잠시 아픔을 덜고 무사히 존재함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는 음악을 소개해볼까 한다. 실제로 친구들과 차를 마실 때 내가 자주 애용하는 음악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저녁시간에 가사 없는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메신저, SNS, 대화를 통해 너무나도 많은 언어를 접하기에 일정한 시간만큼은 언어 없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한참 빠져 듣는 앨범이 생겼는데 바로 요시무라 히로시의 그린 앨범이다. 요시무라 히로시는 사운드 디자인이나 엠비언스 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유명한 아티스트이다. 엠비언스 음악이란 자연적인 공간성을 지닌, 자연과 동물 소리 등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여러 소리를 제공하는 음악을 말한다. 실제로 이 앨범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고 귀를 기울여 들으면 묘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내가 생각하는 귀여운 포인트는 3,4번 트랙의 제목이다. 3번은 이름이 SHEEP, 4번은 SLEEP인데 3번 트랙을 들으면 두둥실한 공간에서 일정하게 무언가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4번 트랙에서는 그러다 너무나도 평온한 어느 곳에 도착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양을 하나 둘 세다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지는 것처럼. 히로시는 실제로 엔지니어와 이 앨범 작업을 하던 중 코를 골 정도로 잠드는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이유가 누군가의 평안한 밤을 빌며 밤 편지를 불렀듯, 히로시는 이 노래가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몸이 퍼지는 상상을 하며 나른해진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몸이 녹아내려 가로로 퍼지다가 1986년에 이 음악을 만들던 히로시의 작업실까지 가닿는 몽상까지 할 정도다. 이처럼 공간감이 있는 엠비언스 음악은 ASMR 같기도 하면서 어떤 시공간을 유영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게 도와준다. 여기서 감각을 강조하는 이유는 감각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내 몸을 인지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현재의 나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어떤 생각이 들면 어떤 생각이 드는구나 하고 인지하는 일,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프구나 하며 다리를 느끼는 일, 좀 더 내려가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의 하중을 받아들이는 일을 하다 보면 잠시나마 걱정을 내려놓고 내 몸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함을 감각할 수 있게 된다. 즉 평안하게 되는 것이다.


2019년 어느 여름 서울숲에서


우리 모두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나는 용기가 부족해 어디가 아프다고 말조차 못 할 때도 있고 여전히 행복을 그럴듯하게 전시하기도 한다. 대화를 사랑하고 무궁무진한 언어가 담긴 책을 좋아하지만 언어가 없는 가보지도 않은 세계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적절한 쉼이 필요하다. 하루를 돌아보며 감정들을 소화하고 다가오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은 나를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만큼은 모두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평안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신을 잘 돌봐 다시 세상에 나와 새로워지고 타인을 섬세하게 매만지며 함께 무사히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밀물과 썰물처럼 항상 오는 건강과 건강하지 못함 사이에서,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당신만의 평온함을 잘 건사하길 바란다. 차마 위로를 건네지 못했던 수많은 당신들을 생각하며 이 밤, 나의 평안이 당신에게 닿길 기도해본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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