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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Nov 09. 2016

한국은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장하준 교수와 청년들이 말하는 그것, 


장하준 교수가 말한 "공정한 사회"에 대한 인터뷰 기사

그리고 청년들이 강탈당한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가 

현 시국을 정리하는 키워드라고 봅니다.


얼마 전 시위 현장에서 시민 자유발언대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한 중학교 학생은 "학생다움을 말하기 전에, 어른스러움 뭔지 먼저 보여달라"

한 고등학교 학생은 "수능을 망치는 것 보다, 나라를 망치는 게 더 무섭다" 

한 아주머니는 "더 이상 아들들에게 노력하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이고, 초등학교밖에 못나오고, 정말 장사만 열심히 하고 살았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http://www.hankookilbo.com/v/748d8e209494484082b0357bdf35f35b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68789.html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68788.html



1. 청년들의 언어


언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데, 

근 몇 년 동안 청년들 사이에서 일종의 고유명사가 된 언어들을 살펴보면 

"헬조선", "흙수저 금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 

절망을 표현한 언어들, 공정하지 못한 사회를 비판하는 언어이다. 

청년들의 시대에 대한 절망이 유머스럽게 묻어나온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어떤 현실이 노출되었길래?

그렇다. 청년들은 아파야 청춘이라는데, 아파도 너무 아팠다. 

수치적으로는 청년 실업률이 심각해졌고, 해결방안이 보이지를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했는데, 구직이 어려워서 빚이 늘고, 그로 인해 악순환에 빠진다고 한다. 

다행히 일자리를 얻은 청년들마저 "몇 십년 일해도 내집은 사기 어렵다"는 진단서를 받는다. 

직장 생활하는데 재벌 총수 자녀들은 "땅콩을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운전자를 걷어찰 때, "내 미래도 저건 건가" 회의하게 된다.

학자금을 갚아야 한다는 청년노동자들에게 "시급 만원"은 역시 국가경제를 위해 희생해야하는 꿈이다. 

구의역에서는 청년 노동자가 사망했고, 그의 가방에서는 컵라면과 젓가락이 나왔다. 






2. 여론은 '공정한 사회'라는 허상에 대한 실망감을 반영


현재 표출되는 특정 정당, 인물, 기업에 대한 분노는 본질이 아닌 현상이다. 

재수없게도 그 정당, 그 사람, 그 기업이 걸린 것이지, 애초에 그런 문제가 한국에 없었을까?




물론 그런 불법은 분명히 짚고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불법의 현상을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이 사회의 근본 작동 기제가 문제의 근본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노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서민들은 그 밑에서 자기들끼리의 치열한 싸움을 했다. 

대기업 연봉과 중소기업 연봉은 그 격차가 유례가 없고, 기업은 하청의 재하청의 재하청으로 일을 한다. 

한국 사회에 공정한 시스템은 없었다. 점점 더 없어져가고 있다.





3. 박근혜와 최순실은 현상일 뿐


작금에 드러난 말도 안되는 사건들은 이런 공정성이 붕괴된 사회의 단면이다. 

재수없게도 우연히 발각되어서, 철저하게 감추지 못해서, 일처리를 허술하게 해서, 그래서 jtbc 기자에게 발견된 아이패드로 들켜버린 한 사건이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화여대의 사태의 확산을 보면, 한국사회의 이러한 점이 축약적으로 시간배열에 따라 나타난다.


1) 처음에는 학위장사를 하는 총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적절한 소통없이 대학의 성격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사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총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비리가 추정되는 지점이었다.


2) 그러다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는 공권력(경찰)을 학생들을 대상으로 휘두른다. 학생 점거에 맞서겠다고,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경찰 1,000명 이상을 투입한다. 언론에는 여학생들을 제압하고 끌고나가는 여경찰들이 나왔다.


3) 그러다가 갑자기 나경원 의원의 딸의 부정 입학 의혹이 한 언론에 의해서 노출되고, 이와 관련하여 권력자들이 공정한 입시의 규칙을 훼손하고,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다수의 사람들을 기만하는 현상이 노출된다. 


4) 자신의 비리 의혹, 나경원 의원의 딸 입학을 둘러싼 비리 의혹을 두고도 총장은 당당했다.


5) 그러다가 갑자기 정권의 비리 의혹과 연결이 되면서, 일이 커지고 총장은 절대 안할 것 같은 퇴진을 갑자기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학생들은 벙쪘다. 누가 뒤에 있길래, 갑자기 저렇게 도망가나...)


6) 드디어 그 유명한 정유라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일개 사학의 비리 사건이 정권 전체의 시스템의 비리와 연결된다. 공정한 입시 시스템의 붕괴는 공정한 정치 시스템, 사회 시스템의 한 단면에 불과한 것이었다. 


7) 다수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침묵하던 이화여대 학생들과 졸업생 다수도, 정유라에까지 이르러서는 "이대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은 당연히 "정권에 대한 비판"에 맞닿게 된다.


이처럼 1), 2), 3) 4) 개인의 비리 문제의 확산, 즉 게임의 룰을 바꾸어가면서까지 공정성을 훼손하는 특정인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다가

이것이 결국에는 5), 6), 7), 8) 사회 전체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이어진다. 






4. 공정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


특정 정치인과 정당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의 삶에 녹아든 공정하지 않았던 게임들은, 사회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지금뿐만 아니라 청와대 안에서도 KBS에 전화해서 보도하지 말라고 한 '공정언론' 을 해친 사람이니 지금의 행동들도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언론의 공정을 해쳤다. 언론의 공익적 성격을 침해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정한 언론이 붕괴된다. 언론은 통제당하고, 언론의 총수를 정권이 지명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침묵하지 않겠다"며 길거리에서 외친 청년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고, 재벌들은 풀려난다. 재벌들이 아니어도, 부당한 판결들이 많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아닌, 어떻게든 권력에 줄을 대어 불버적 특혜를 얻는 것, 

그리고 그러한 불법에 대한 댓가를 치루지 않고 넘어가는 것.


정의는 사라진 것.

이런 것은 친일파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의 역사적 책임이고,

남한 사회의 비극이다.


이후 지속된 독재 권력자(수많은 시민들의 피를 아무렇지 않게 여긴)들과, 이와 결탁된 재벌 권력, 

옆에서 빌붙어 먹은 수많은 이익 집단들의 사례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영민하게 사는 법"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벌레의 알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낳는다. 


그래서 방법이 어떻든, 과정이 어떻든,

권력자가 운하는 성과를 낸 사람은 출세한다.

영화 "자백"에 나온 김기춘, 박정희 정권에서 성장하고, 박근혜 정권에 터줏대감이 된 김기춘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은 국정원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많은 무고한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해서 승진했는데,

50년, 40년, 30년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이제 억울한 사정이 풀려 (시민단체들에 의하여) 감옥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된 대학생들에게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으면서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잡아뗀다.


이런 사회에서 "성과주의"가 강조되는 최근의 추세는 두렵기까지 하다. 

성과만 내놓으면, "무조건 되게하라"는 리더의 말만 따르면, 인정받을 거고, 

그 주변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되겠지





5. 한국사회가 말하는 "공공의 이익"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공공의 이익"은 그야말로 개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반드시 그 밑에는 개인의 희생이 깔려있다.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서 정부는 돈을 받아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IMF 같은 재벌과 금융, 정부 경제정책의 잘못은 결혼반지를 파는 금모으기 운동으로 극복해야 하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대통령과 외교부에 의해 "대승적 견지에서 정부를 이해해야" 한다고 통보받는다. 



한국사회에서는 밀이 말한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 즉 이익의 총량의 극대화 논리가 잘 먹혀들어갔다.

국민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는 희생해야 했고,

그래도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삼성이 잘 되어야 했고,

삼성은 무노조라고 자랑을 했고,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은 500백만원 받는 것으로 퉁치고, 정유라가 몇백억을 받는 것을 지켜봐야했고, 

기업이나 군대 내에서 비리 사건에 대한 공익 신고자들은 해고된다. 



한국사회에서 공공의 이익은 무엇인가?

집단의 이익인가, 개인의 이익인가

개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가, 사회의 계약을 기반으로 하는가

국가는 개인과 지역사회를 잡아먹는 공룡인가? 보호자인가?



한국사회에서는 전자가 우세였다.

밀을 극복했던 제러미 벤담의 "최소수혜자의 최대행복"이라는 논리는 별로 논의되지 않는다.

경제학적 증명에도 불구하고, 기본 소득 등 복지는 왜곡되거나 정치이념적으로 공격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자유경제원은 디턴의 노벨경제학 수상작을 오역하여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일이 있다.

경제 성장을 하려면,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는 그의 증명을,

정확히 반대로 왜곡시키면서, 거짓말을 했다. 

자유경제원은 부당한 권력에 빌붙어 일부 재벌가문들의 감옥 탈출 등을 돕고 있는 전경련이 돈을 대는 연구원으로 철저히 재벌 가문의 이익을 대변한다. 

(얼마 전에는 이승만 찬양시 대회에서 이를 언어유희로 비판한 응모자에게 대상을 줘놓고도, 그 사실이 놀림거리가 되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였다.)

자유경제원은 EBS에서 방영한 "자본주의"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자본주의에서도 민주화,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다루자, 즉각 색깔을 덧씌우면서 방송사 자체를 거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정도로 매도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한선교라는 의원은 교육부 장관에게 "교육부가 EBS를 통제하라"라고 고성을 높인다.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를 씌우고 파이를 나누어야 한다"는 밀의 분배론은 한국사회에서 정확히 반대로 적용된다.

분배의 자리에, 순위를 매기는 자리에, 삶을 좌지우지하는 결과가 결정되는 순간에,

"베일을 모두 벗기고, 너희 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는지, 너는 어떤 실세와 연결이 되는지"를 명확히 밝힌 후 면접이 이루어지고, 채용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최경환 전 장관의 인척은 공공기관에 강제로 취업하고,

정유라는 대한민국의 기대주로 7명 의원의 비호 아래 성장하고, 

차은택의 지인들은 한국컨텐츠 진흥원장, 뉴욕 파리 문화원장 등 공모직에서 승리한다.





6. 문제에 대한 정의 : 리더십이 부족한건가?



대통령만 바꾸면 되나? 대통령의 책임인가?

진정한 리더가 없어서 그러나? 철인정치를 할만한 현자가 없어서? 

나라를 이끌 세종대왕이, 이순신이 없어서 그럴까?

시민들의 집회가, 국민들의 목소리가 정권교체가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근대를 건너뛰어서 전근대에서 현대로 진입한 한국은 아직도 "왕을 따르려고" 하는 기질들이 남아있다. 

뭔가 "리더의 현현"을 바라고, 그에게 과도한 기대를 투영한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의 일상을 둘러싼 수많은 가치 판단과 정치적 행동에는 유보를 표명한다. 

리더인 그/그녀의 의견을 맹신한다.



정치 뿐만 아니라 어르신의 말은 무조건 옳은 것 처럼 따르는, 

누군가의 해설을 원하는,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를 묻고 받아적는, 

무책임한 참여의식의 결여가 줄줄 새어나온다. 

그런 어르신이 혹여나 비리가 있거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하면, 

"그런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해" 라거나 

온갖 모호한 표현들이 동원되면서 

집단을 위한 개인의 멍청함화 혹은 민주의식의 무력화가 이루어지고, 심지어 정당화 된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덕목으로 아는 것은 아마도 암기하는 형태의 교육의 부산물일 것이다. 





7. 리더보다 개개인의 시민의식과 참여가 중요하다



투표를 하자고 한다. 리더를 잘 뽑자고 한다. 

제대로 된 리더를 키우자고 한다.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고 이건희가 외친다.

투표는 잘해야 한다. 리더 잘 뽑아야 한다. 좋은 리더 길러내어야 한다. 



그러나 투표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의 가장 소극적인 형태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리더 양성은 특별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리더인 것이고

올바로된 교육, 역사 교육, 미디어 독해가 이루어지면 따라온다.

리더에 대한 기대감, 맹신이 비민주적 조직을 만든다.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 민주주의 사회로서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오류들이 마구 뒤섞여있다.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회장, 제왕적 회장 아들, 제왕적 목사, 제왕적 교수, 제왕적 리더십은 어떠한 조직을 이끌 때 리더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이런 제왕들에게 달리지 않았다. 

사회의 발전은 시민들의 의식의 발전, 참여, 언론의 비판과 권력에 대한 견제에서 온다. 



그런데 리더에 대한 맹신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조작을 이끌고, 심지어 맹신을 만든다.

영화로는 있지도 않은 현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덕혜옹주"라는 극히 전근대적인 '공주'를 하나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무리한 시도가 있었고, 

박정희가 광복군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자 한다.

"그래도 정치는 하던 사람이 해야지"라면서 부패, 무능 정치인들을 뽑는다. 

이런 점에서 최근 박원순의 인터뷰 기사에 있는 발언들이 신선하다.

왜 "대통령"인가

뭐 그렇게 이름이 거창한가?

"시장'이라고 하듯이 "국장"이라고 하라.

대통령의 지위와 이미지와 권력과, 그 모든 것을 격하시키고 가볍게 만들어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21&aid=0002373203&sid1=001




8. 피해자, 사회 약자를 포용하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논란이 많지만, 그래도 국제사회를 대변한다는 UN에서는 Sustainable Development를 말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슬로건은 "No One Left Behind"이다.

한 사회의 수준, 한 조직의 수준은

가장 소외된 사람, 가장 취약계층이 받는 대우, 그들의 삶이다.


그러한 면에서 노년층 50%가 빈곤층으로 전락한 한국사회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일가가 가난에 시달리다가 집단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청년들은 한국에서 꿈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난다. 그게 한국 사회의 수준이다. 

한국이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공공의 이익을 제대로 실현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돈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부끄럽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로부터 보장받은 부와 재산에 대하여 보답하기를 바란다. 

특권층과 취약계층이 "무지의 베일" 앞에서 공정하게 기회를 얻고, 동등한 인격으로 대우받기를 원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0&aid=0003017445&sid1=00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07213903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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