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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Jun 03. 2024

아이들 눈치 보기

나는 학생 눈치를 보는 교사다. 

눈치를 본다는 말이 비굴하게 비위를 맞춘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 지금 어떤지 살펴서 

내가 주로 하는 탐구 수업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주제로 이끌어야 하나 

시시각각으로 고민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정말 좋은 바로미터가 있다. 

바로 형진이다. 

형진이는 내가 제시하는 것을 빨리 파악한다. 

그리고 반응이 정말 즉각적이다. 

무엇보다 분영하다.  



형진이는 저학년이지만, 가끔 고학년 학교 운동부같이 느껴진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탄탄한 몸집에, 유연하고 탄력 있는 움직임도 그렇지만 

수업을 하다 보면 쉽게 지루해한다. 

뭐든 처음엔 반짝 호기심을 가지다가 몇 번 발문이 이어지면 

이내 하품을 하며 화장실을 간다고 한다. 

돌아와서는 주위 아이들을 집적거리며 장난친다. 

다른 아이들의 수업이 방해되니 그럴 때 주의를 주면. 

이번에는 나나 아이들의 말에 토를 단다. 

2학년 치고는 덩치도 좋고, 목소리도 크다.



반 아이들도 형진이를 재미있게 생각해서 

형진이가 큰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면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수업이 산으로 가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매번 야단을 할 수도, 그냥 놔둘 수도 없고.

나로서는 그런 형진이가 부담스럽다. 

그런데 형진이는 탐구 수업을 좋아한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내가 복도에 나타나면 형진이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반 아이들에게 뛰어가 "수석선생님 왔어"를 외친다. 



그날도 나는 형진이의 반응을 예상하며 수업을 구상했다. 

발문이 여러 번 이어지면 지겨워하니까, 

중간중간 동영상이나 사진 자료를 배치하고,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넣었다. 

되도록 내 말을 줄이고, 아이들이 좀 더 많이 참여하도록 짰다. 

그런데도 좀 부족한 느낌이었다. 

장소를 옮기거나,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제가 마을 지도 만들기였고, 따라서 머리를 써야 했다. 

수업을 하면서 형진이의 눈치를 봤다. 



처음엔 <우리 마을 탐험하기> 숙제를 통해 본 것을 말하고, 

인터넷 지도 앱을 사용해서 마을 지도를 지적도에서 확인하고, 

같은 장소를 항공뷰로도 보고,마지막엔 로드뷰로 실제 거리 모습을 살폈다. 

아이들은 지도를 보자 신기해하기도 하고, 이미 봤다며 시큰둥하기도 했다. 

그래도 자기가 아는 곳이 로드뷰로 나오자 열정적으로 

자기 집, 혹은 학원, 아빠 가게라고 외쳤다. 

또 로드뷰에서 계속 앞으로, 뒤로, 혹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보고 싶어 했다.

형진이도 지금 나온 아파트가 자기 집이고, 위쪽으로 가면 할머니 집이라며 흥미로워했다. 

다행이었다. 



그다음은 우리 마을 지도를 만들었다. 

전지 크기로 출력한 큰 지도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건물을 작은 카드에 그려 

실제 위치를 찾아 입체로 붙여야 했다. 

그리기와 글씨 쓰기를 유독 싫어하는 형진이인 지라 염려되었다. 

형진이는 뭔가를 쓰거나 그려야 하면 정말 아무렇게나 해서 가장 먼저 해내는 편이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그래도 이 앞에 지도 보기만이라도 잘 참여했으니 됐다

어라, 형진이가 뭔가를 꽤 열심히 그린 후, 공들여 색칠하고 있었다. 

'야구야'라는 야구 클럽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전 마을 탐험에서 자기가 알게 된 곳을 말할 때도 '야구야'였다. 

물어보니 환해진 표정으로 작년부터 야구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야구야는 7km 떨어져 있어 내가 준비한 지도에는 나타날 수 없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1km 반경의 지도였다.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형진이는 야구야 카드를 완성해서 지도에 붙이려고 다가왔다. 

야구 글러브와 공을 그린 간판이 꽤 그럴듯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맨 위 북쪽에 붙여주며 말했다. 

"야구야는 여기서 더 멀지만, 지도가 작기 때문에 그냥 여기 붙일게."

실망하고 짜증 낼 줄 알았던 형진이는 순순히 그러자 한 후, 

다른 아이들이 붙인 건물을 유심히 봤다. 

"어? 나도 이거 아는데. 막창도둑. 율이네 아빠 가곈데. 나도 가봤어요. 이거 그려도 돼요?"

막창도둑은 이미 율이가 그렸지만, 

지도에 같은 건물이 하나 더 있다고 큰 일 날 것도 아니고 해서 "그래"했다. 



그때부터 수업을 마칠 때까지 형진이는 '야구야', '막창도둑', ' 맨즈 헤어 클럽', '팡팡 키즈카페' 등 

무려 4개의 건물을 완성했고, 위치를 가늠해서 지도에 붙였다. 

솔직히 교육과정에는 우리 마을에 있는 관공서와 가게, 역사적인 곳 등 

아이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카테고리화해서 인식하고 다양한 건물을 나타내도록 한다. 

그렇게 보면 형진이의 결과물은 한쪽으로 치우쳤다. 

사실 나는 수업을 진행할 때 이에 근거해 아이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10% 정도의 아이들만 내가 안내한 대로 

행정복지센터, 보건소, 도서관, 경찰서, 석빙고, 6.25 참전기념비 등에 관심을 가졌고, 

나머지는 형진이의 결과물과 대동소이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각자 경험한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머릿속에 기억으로 저장하는 역량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대다수의 아이들은 내가 안내한 장소에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 보았다고 해도 아직 공간을 인식하는 능력이 그만큼 발달하지 않아 

기억으로 남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성장 시계대로 공간을 인식하는 능력이 발달하겠지.

아이들이 교육과정과 다른 성취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그대로 잘 알아듣기를 기대하는 교사가 어리석다. 



문득 형진이가 정말 즐겁게 지도 만들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진이는 또 왜 이리 즐거워하지?

형진이는 몸을 움직여야 즐거워하는 아이인데?

자기가 갔던 곳을 떠올리며, 거기서 있었던 일을 친구와 연신 재잘댄다. 

아하! 갔던 곳을 떠올리는 것도 몸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형진이는 몸을 움직인 기억을 반추하는 것도 그만큼 지금 즐거운 것이다. 



자기가 경험한 일을 다시 떠올리며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친구와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친구들의 경험을 통해, 책을 통해, 기타 등등을 통해 

내 경험을 확장하는 일. 탐구 학습의 본질이다. 

누구에게나 그 과정은 꽤나 즐겁다. 



교사의 재능은 아이들의 머릿속 경험과 지금 경험을 연결하는 데 있다고 본다. 

만일 내가 아이들 머릿속 경험의 지도를 엉뚱하게 현재와 연결시키면

그때부터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형진이가 하품하고, 

몇몇의 아이들이 가위나 풀을 꺼내 손장난 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탐구 수업은 교사에게도 곤혹스럽다. 

28년째 하는 수업이 아직도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눈치를 본다. 

아이들이 경험했을 법한 발자취를 최대한 그럴싸하게 상상해 본다.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리지만, 

눈치를 보며 맞춰나간다. 

자꾸 틀리다 보면 언젠간 더 맞는 날이 오겠지. 

오늘도 형진이 자신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말없는 신호를 내게 보냈다.  

'선생님 오늘은 맞았어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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